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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계절들을 반복해서 준비하는 삶 남이 쓴 여행기를 재밌게 읽지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여행기는 재미있다. 여행을 대하는 자세나 깜냥이 비슷해서일 것이라 생각한다. 왜 내가 감히 스스로를 초유명한 작가랑 같은 여행깜냥을 가졌냐고 하는지는 여행기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아저씨는 나 못지않게 게으른 편이다. 그래서 한 여행에 한 가지 이상의 테마를 잘 설정하지 않는 듯하다. 나도 예를 들어 피자를 먹으러 떠난 이탈리아 여행에선 어지간하면 피자만 먹는다든지, 뉴욕에서도 내내 피자만 먹고 다녔다든지, 맥주 마시러 떠난 여행에선 양조장만 죽어라 가고 밥은 대충 때운다든지 한다. 도무지 한 가지 이상의 목표 이상은 세우기도 달성하기도 어렵다. 피자랑 맥주를 그렇게까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안 그래도 낯선 환경에서 오..
지겨움을 참고 그냥 하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일이 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본심이니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일이 하기 싫다. 일 자체는 좋아한다. 집안일도 좋고 정원일도 좋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의 일은 목적이 너무나 아득하다. 하나하나의 타스크를 살펴보면 내가 즐기고 잘하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 회사에게 더 큰 수익을 가져다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방식은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거시적인 목표는 프로덕 개발 프로세스조차 자동화를 많이 시켜서 중단기적으로 나 같은 개발팀원의 수를 줄여나가기 위함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들어갈 무덤을 스스로 정성스럽게 파고 있는 것이다. 매 달의 월급을 위하여. 언젠가 레이오..
목욕이 너무 좋아 한국에 오면 꼭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판데믹 시절에 목욕탕들이 영업을 안 해서 작년에야 처음으로 갈 수 있었다. 올 해도 한국에 오면 하고 싶은 것 목록을 작성하며 잊지 않고 '목욕탕 가기(가능하면 세신 도전)'을 써놨었다. 독일에도 사우나가 있지만 한국의 목욕탕과는 좀 다른 맛이다. 따뜻한 온탕물에 들어가 앉아있다가, 냉탕물에서 몸을 빠르게 식히고, 다시 온탕물에 들어가서 짜르르하게 온기가 몸에 스며드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시설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거칠거칠한 타월로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내는 행위는 아무래도 서양국에선 하지 못하겠지. 목욕탕에 가는 것은 추운날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찬바람 쐬고 목욕탕까지 걸어가서 ..
끝이 없는 진로 고민 네이버 국어사전에 '진로'란 단어를 입력하니 여러 가지 뜻이 나온다. 진로 1 進路 - noun 앞으로 나아갈 길. 진로 2 塵勞 - noun 불교용어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진로 振鷺 - 1. noun 북한어 백로가 훨훨 나는 모양. 2. noun 북한어 결백한 현인(賢人)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나를 괴롭히는 것은 첫 번째 진로일까 두 번째 진로일까. 헛갈리는 이유는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고민에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욕망이나 망념이 자꾸 끼어 들어서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바라보는 것부터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욕망이 종종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는 휘몰아치는 바람 속의 갈대처럼 온갖 방향으로..
근황과 잡생각 계절성 우울증이 찾아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헬스를 시작한 지 일 년을 슬쩍 넘겼는데 요즘 매우 게을리하고 있다. 주 2회 정도 가서 예전의 70% 정도만 하고 온다. 작년 이맘때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시점이려나. 아무튼 지금보다는 훨씬 더 활기차게 보냈던 것 같다. 요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귀찮다. 이제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조차 없다. 쉬어야 내일 또 일하지, 생업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게 어디냐 싶은 수준이다. 괴로운 노동의 나날을 버티게 해주는 이야기가 담긴 책, 영화, 드라마나 기타 관심사에 푹 빠져있을 정신적 체력도 바닥이다. 그냥 누워서 봤던 만화책을 또 읽거나 주제가 너무 무겁지 않은 영화를 보는 정도가..
일단 가 보자, 루이지애나 문학축제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뮤지엄은 2017년에 나 홀로 떠났던 북유럽 배낭여행 때 들러보고 반해서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때때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흥미로운 전시가 예정되어 있나 살펴보고는 했다. 한동안 잊고 살다가 정말 간간히 생각나면 찾아봤다. 이곳에서 문학제를 한다는 것을 안 것도, 판데믹 이후 오랜만에 열리는 문학제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초대되어 온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니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올봄쯤에 이 소식을 접하고 무작정 문학제 일정에 맞춰 뮤지엄 근처의 숙소를 이틀밤 예약했다. 어떻게 티켓을 구하는지, 프로그램 등에 대한 정보는 전혀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난번 경험에서 볼 때 코펜하겐에서 이 뮤지엄이 있는 훔멜벡이란 도시가 멀지는..
책 - Design for a better world 돈 노먼 선생님의 신간 Design for a better world를 지난달쯤부터 읽고 있는데 중간에 아프고 그래서 아직 3분의 1 정도 읽었다. 읽다 보니 문득 나의 전공 -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 경영학 - 두 개가 굉장한 연관성을 가졌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경영학 수업들 전부 다 흥미가 없었는데 유일하게 흥미롭던 수업이 business psychology와 거시경제학이었고 여기서 다룬 행동경제학 내용이 너무 흥미로워서 평소에 안 하던 연관도서를 찾아 읽는 행위까지 했었다. 돈 노먼 선생도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행동경제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드러낸 초유명작 Design of everyday things를 쓰셨으니 이 분의 책이나 강연에 내가 관심이 지대한 것이 설명이 된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집에서 보내는 휴가 최근 들어 회사 일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했다. 팀 구조가 바뀌면서 새로운 커다란 책임이 팀에 부여되었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며 6개월 정도 우왕좌왕하는데 시간을 쏟는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어서 커다란 한 꼭지를 마무리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큰 부서회의에서 그 내용을 발표했는데, 원래 발표자인 프로덕매니저가 휴가를 앞당기게 되면서 -_- 내가 하게 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팀의 전반기 성과물을 대표해서 발표하는 것이 너무 부담되어 대본도 여러 번 고쳐 쓰고 연습도 많이 했다. 다행히 발표는 잘 끝났고, 완전히 칭찬을 많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70점 정도밖에 안 되는 발표였지만 나를 만족시키기가 원래 가장 어려운 법. 이러한 무게감과 오전 오후 꽉 찬 미팅스케줄 때문에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