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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집에서 보내는 휴가

우리 고양이 귀여워

최근 들어 회사 일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했다. 팀 구조가 바뀌면서 새로운 커다란 책임이 팀에 부여되었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워하며 6개월 정도 우왕좌왕하는데 시간을 쏟는 동료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어서 커다란 한 꼭지를 마무리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큰 부서회의에서 그 내용을 발표했는데, 원래 발표자인 프로덕매니저가 휴가를 앞당기게 되면서 -_- 내가 하게 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 팀의 전반기 성과물을 대표해서 발표하는 것이 너무 부담되어 대본도 여러 번 고쳐 쓰고 연습도 많이 했다. 다행히 발표는 잘 끝났고, 완전히 칭찬을 많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70점 정도밖에 안 되는 발표였지만 나를 만족시키기가 원래 가장 어려운 법. 이러한 무게감과 오전 오후 꽉 찬 미팅스케줄 때문에 번아웃 증상도 겪고, 성격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8월에 예정해 둔 2주짜리 휴가를 반 잘라서 7월에도 1주일 쉬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주에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밀린 집안일과 정원일을 하고, 진도가 안 나가던 책도 읽고, 게임도 하면서 느긋하게 보내고 있다.

 

월요일에는 엉망인 내 작업방 청소를 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랩탑 주변이며 어지럽게 책과 서류가 쌓여 있는 사이드보드 위를 정리했다. 서랍 안도 한 번 뒤엎어 정리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정리가 된 채로 별로 어지럽히지 않고 쓰고 있어서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다음번으로 미뤘다. 나도 꽤 어른이 된 것일까? 정리 한 번 해둔 것이 이렇게 오래가다니!

그동안 바빠서 빵을 굽지 못했는데 내가 구운 빵이 너무 먹고 싶어서 전날부터 준비한 도우 스타터로 오랜만에 통밀+씨앗빵을 반죽했다. 사워도우 특성상 굽는 건 다음날에나 할 수 있다. 그리고 껍질 까서 먹을 시간도 없어서 반년정도 팬트리 위에 있던 땅콩들을 다 까서 볶아서 갈아서 땅콩버터를 만들었다. 직접 만든 땅콩버터가 이렇게 맛있을 줄은 차마 몰랐고 단지 너무 오래된 땅콩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양이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너무 맛있어서 결국 빵이랑 사과랑 함께 이틀 만에 다 먹었다.

 

화요일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빵을 굽고, 다음 주에 면접 봐야 할 회사랑 업계에 대해 공부했다. 조사하면서 파생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나중엔 레이싱게임 조사까지 했다. 전혀 상관없는 것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 멈추고서 책을 읽었다. 중반까지 읽어놓고 마무리를 못한 책들이 두어 권 있는데 일단 한 권을 다 읽어 끝냈다. 새로 산 전자책 리더기 덕분에 눈마새도 다시 읽고 있는데 이건 아껴서 읽게 된다. 운동을 다녀와서 오래간만에 젤다도 했다.

 

수요일엔 주부모드였다. 바닥청소와 옷장 정리를 했다. 옷장 안에 임시로 넣어둔 조립형 선반들을 다 분해해서 지붕 아래 다락으로 치워버렸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근처에 있는 거미줄들을 청소했다. 로봇청소기를 뒤집고 분해해서 다 닦았다. 빨래대에 일주일가량 널어져 있는 빨래더미를 다 걷어다가 갰다. 그리고 면조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도 만들었다. 집과 냉장고 안이 점점 깨끗해진다.

 

오늘은 목요일. 오전에 정원일을 좀 했다. 장미들 여름 가지치기와 잡초제거를 했다. 비오토네를 뒷마당으로 옮겨 가득 채울 만큼 너무 길게 자란 가지들을 자르고 잡초를 뽑았다. 아침을 먹고 어제 배달된 새 책을 읽었다. 존경하는 돈 노먼 선생님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디자인하는 법이란 책인데 첫 챕터를 80% 정도 읽었다. 단기적 성과만을 위해 일하다가 잠깐 쉬어가는 타이밍에 이런 거대한 아이디어를 읽게 되어 좋다. 이 분이 대단한 점도 있고 나와는 입장이 다르기도 하지만 근시안적으로 상사의 요구사항에 맞춰 디자인하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물론 내 잘못은 아니고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큰 의의와 의미를 알려주는 현자가 책을 써줘서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휴가가 끝나도 아침마다 한 꼭지씩 바이블 읽듯이 꼭꼭 씹어 읽어야지.

오전 내내 정원에서 일하고 종이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더니 휴대폰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씨가 얼마나 더워질지 궁금해서 날씨를 확인하러 2층에 있는 휴대폰을 처음 열었더니 12시가 좀 안되었길래 갑자기 12시까지는 디지털 디톡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몇 분 더 기다렸다가 날씨를 확인했다. 큰 의미는 없지만 이런 적이 드물어서 기록해 둔다.

오후에는 배가 고파질 때까지 편지를 썼다. 한시 좀 넘으니 배가 고파져서 점심밥을 거하게 차려먹고, 산책 삼아 편지를 부치고 빈 유리병을 재활용함에 버리러 다녀왔다. 그리고 아이스커피를 한 잔 말아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틈틈이 누워있기도 하고 낮잠도 자고 오래간만에 스트레스 없이 시간을 쓰고 있어서 럭셔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가 돈을 주고 시간을 산다고 하던데 정말이다. 물론 나는 지금 유급 휴가를 쓰고 있으니 부자도 아니고 돈을 주고 시간을 산 것도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추가로 오늘 오전부터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시간이 아주 약간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아무래도 소셜미디어 피드나 단톡방 같은 거 (밀려 있으면 거의 안 읽지만) 체크해서 빨간 배지 없애고, 팔지도 사지도 않을 주식 가격 확인하고, 진짜 나한테 온 것도 아닌 이메일 확인하고 지우느라 내 시간이 많이 증발하고 있다. 요즘 도파미네이션이나 도둑맞은 집중력 같이 이런 현상을 짚고 원인을 개선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서 솔깃하다. 아직 읽고 있는 다른 책들이 많아서 읽을 생각은 안 하고 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읽겠지. 아마 안 읽고 다음 유행이 와서 관심이 옮겨갈 가능성이 더 크다.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 자고 싶을 때까지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고양이랑 누워서 뒹굴대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거나 배가 고파지면 비로소 침대에서 나오는 아침이 너무 좋다. 아침잠이 많은 덕분에 오전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선선한 시간 동안 환기하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집안일이나 정원일을 하고, 커피 한 잔 하면서 또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보내면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식물성 단백질로 가득한 점심식사를 하고 잠깐 몸을 움직이며 주방 정리나 산보를 다녀오고, 또다시 긴 오후시간을 재밌게 보낼 책이나 게임을 고르는 즐거운 고민을 한다. 그리고 퇴근한 면조랑 같이 운동 다녀와서 간단한 저녁을 먹는다. 내 생체리듬에 따라 스트레스받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삶의 패턴 같다. 단 일주일만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다니 아쉽다. 가급적 계절마다 한 번씩 이런 주간을 갖고 싶다. 물론 20세기말에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온 사람으로서 이런 정도의 목가적인 삶을 누리고 사는 것도 되게 레어 한 행운이겠지. 다음 주부터는 다시 열심히 일하며 나의 존재의의를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하니 걱정은 그때로 미루고 최대한 빈둥빈둥 남은 시간을 느긋하게 놀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