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루이지애나 뮤지엄은 2017년에 나 홀로 떠났던 북유럽 배낭여행 때 들러보고 반해서 언젠가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때때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흥미로운 전시가 예정되어 있나 살펴보고는 했다. 한동안 잊고 살다가 정말 간간히 생각나면 찾아봤다. 이곳에서 문학제를 한다는 것을 안 것도, 판데믹 이후 오랜만에 열리는 문학제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초대되어 온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니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올봄쯤에 이 소식을 접하고 무작정 문학제 일정에 맞춰 뮤지엄 근처의 숙소를 이틀밤 예약했다. 어떻게 티켓을 구하는지, 프로그램 등에 대한 정보는 전혀 공개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지난번 경험에서 볼 때 코펜하겐에서 이 뮤지엄이 있는 훔멜벡이란 도시가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차와 버스를 타고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것만 떠올리며 작은 도시 훔멜벡에 있는 몇 없는 숙소 가운데 그나마 너무 치명적으로 비싸지 않은 곳을 예약했다. 예약을 하고 보니 3명까지 잘 수 있는 꽤 큰 통플랫이라 6월쯤 면조를 설득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뭘 타고 가면 좋을지 고민을 했는데, 의외로 비행기가 연결 편이 불편했다. 집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기차 타고 가서 비행기를 타고 코펜하겐 근교의 공항에 내린 후 또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기차를 갈아타고 숙소가 있는 동네까지 가야 했다. 비행기는 탄소발생률이 가장 높은 이동수단이라 꼭 타야만 할 때에도 죄책감을 가지고 타는데, 이런 조건에서 선택하기에 최적의 선택은 아니었다. 두 번째 옵션은 기차였는데 지난번에 나 혼자 다닐 때 기차를 타고 다닌 경험도 나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차는 그 느린 이동시간과 불편함을 고려했을 때 가격이 너무 비쌌다. 결국 둘이니까 번갈아 운전하면서 가는 두 번째 장거리 로드트립을 하기로 했다.
직접 운전해서 가면 좋은 점은 중간 중간 루트 위에 있는 도시에 사는 친구나 지인을 방문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면조와 사이가 좋은 양조장 동료였던 친구 J가 사는 덴마크의 어부들이 사는 곳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집에서 바로 덴마크까지 가면 운전시간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 함부르크 근교에서 1박을 하고 이동했다. 함부르크에서 저녁나절을 보내는 김에 궁금했던 양조장+비어가든에 들르기로 했다. 그 지역에서는 유명한 Ratsherrn의 비어가르텐은 항구도시 특유의 웨어하우스 분위기의 길쭉한 빨간 벽돌 건물이 둘러싸인 중정 형태의 공간에 꾸며져 있었다. 함부르크는 도시 전반에 철을 소재로 한 건축/토목 재료가 흔하게 보였다. 이 비어가르텐에도 철골 구조로 각 테이블을 연결해서 조명을 걸거나 비를 피하기 위한 지붕소재를 얹거나 하는 구조물이 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맥주도 몇 잔 맛있게 마셨다. 놀랍게도 남쪽지방의 자부심이라 생각하고 있는 ㅋㅋ 헬레스가 정말 맛있었다. 마침 시간을 내어주신 펜팔친구 N님과 맥주 한잔 같이 할 수 있었다. 즐거운 저녁이었다.
함부르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일찍 근처 아시아 마트에 들러 - 규모가 엄청 커 보여서 구경하고 싶었다 - 컵라면 두 개랑 큰 간장 하나를 샀다. 물가가 살벌한 덴마크에서 배고프면 야식 삼아 먹으려고 산 컵라면인데 막상 그대로 들고 와서 집 찬장에 있다. 주유하면서 맥도널드의 아침 세트를 먹고 여행하는 기분을 만끽하며 국경을 넘어 달리고 달려서 J가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굉장히 한적하고 갈대 같은 식물이 바닷가를 바라보며 넓게 자라 있는 실로 평평하고 고즈넉한 작은 마을이었다. J는 낚시여행을 온 사람들을 위한 숙소, 카페테리아, 테라스, 작은 샵이 있는 건물을 직접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투어를 시켜주었다. 설계는 전문가가 했지만 시공을 하는 다른 인부들을 돕고 지휘하며 직접 만든 건물을 뿌듯하게 소개했다. 근사하고 즐거워 보였다. 늘 직접 집을 짓는 것이 꿈이었는데 못 할 것도 없겠는데? 싶은 생각조차 들었다. 직접 준비해 준 덴마크의 페스트리들과 커피, 그리고 독일맥줔ㅋㅋ를 나눠 마시며 잠깐 쉬다가 다시 인사하고 떠나왔다. 편안하고 영감이 차오르는 시간이었다.
또다시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아주 비싼 섬과 섬을 연결하는 철교를 지나서 코펜하겐을 지나 숙소가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가는길에 미처 미리 확인하지 못했던 그날 저녁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인터뷰세션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랴부랴 티켓을 온라인으로 사고 - 미리 살 수 있다는 것도 미처 확인하지 않았다. - 늦을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뮤지엄으로 갔다. 주차할 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워서 정말 똥줄이 탔다. 다행히 내가 한 번 가본 뮤지엄의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어서 시작 직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저 위에 사진이 그 공간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잔디밭에 앉아서 대담을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4월에 출간한 신작 장편소설의 도입부를 일본어로 낭독했다. 다행히 인터뷰는 영어였다. 일본이나 다른 곳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다면 내가 이해하는 언어를 해주는 그를 볼 수는 없었겠지. 도합 천 킬로 넘게 달려온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인터뷰 내용이 중간중간 너무 웃겼다. 시종일관 '나는 그냥 소설을 쓸 뿐인 평범한 인간이고, 엄청 장대한 기획이나 암시를 치밀하게 계획해서 쓰지도 않아요'라고 표현하는 작가와 '그래도 당신 소설들을 보면 일종의 공유되는 메타포 어쩌고' 하며 분석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와 때때로 어긋나는 티키타카를 구경하는 것이 관객으로서 지켜보기에 웃음이 나는 부분이었다. 어스름이 져서 차갑고 축축해지는 언덕의 잔디밭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마법 같은 풍경 속에 내가 있었지만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지 않아서 좋았다.
금요일 저녁의 축제 일정이 끝나고 나와서 슈퍼마켓이 문을 닫기 전에 부랴부랴 장을 봤다. 스파게티랑 페스토를 사고, 달걀과 올리브, 몇몇 레토르트 냉장제품과 냉동빵을 샀다. 이걸로 저녁을 해먹고 다음날 아침을 해 먹었다. 다음날에는 하루키의 사인회가 있었다. 45분으로 예정된 시간 안에 다 받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미 서 있었다. 우리도 희망은 좀 적었지만 줄을 서봤다. 집을 떠나기 전에 부랴부랴 들고 온 '기사단장 죽이기' 상권에 받고 싶어서 들고 있으니 우리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 무슨 책이냐고 물어봤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면서 상쾌한 바닷바람과 너무 뜨겁지 않은 햇빛을 쐬면서 기다리니 기다리는 시간도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직접 사인을 받지는 못하고, 몇 개 남은 미리 싸인이 된 덴마크어로 된 '도쿄 기담집'을 구입할 수는 있었다. 덴마크어는 전혀 몰라서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사버렸다.
오후에는 코펜하겐 시내를 잠깐 구경했다. 전에 가봐서 좋았던 팝업 푸드마켓 같은 곳이 모인 곳에서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덴마크 음식을 파는 곳에서 간단한 식사와 와인을 한 잔 했다. 사실 지난 7여년간 유럽의 도시들을 어느 정도 둘러본 시점에 코펜하겐은 정돈되고 아름다운 도시지만 특별한 인상을 주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물가가 대단히 비싸고 주차비가 어마어마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엄청 비싼 주차딱지를 매우 부당하게 뜯겨버렸다. 물을 사려고 잠깐 들른 슈퍼마켓의 주차장에 차를 댔는데 약 5분 사이에 벌금 티켓을 끼우고 있는 사람을 봤다. 당장 가서 따졌지만 그 주차장을 대리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난 악덕회사고 그 사람도 그 똘마니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을 뿐인 사람이라 무례하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벌금의 이유는 주차시간을 표시하는 파킹디스크를 윈도 실드에 잘 보이게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전까진 기분 좋게 다녔지만 이 사건 이후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다시 숙소가 있는 한적한 동네로 돌아왔다. 어제 잔뜩 만들어서 남겨둔 스파게티 등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숙소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좋은 안마의자에 앉아 피로와 근심을 풀고 잠이나 잤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숙소 주인가족은 친절하고 산뜻한 사람들이었다. 덴마크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 인상적인 건축물을 하나 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Copenhill이란 산업폐기물 처리소 공장을 인공적인 잔디 언덕으로 조성해서 스키 또는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설계한 멋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전날 저녁에 둘러보러 갔다가 어떤 그룹이 통채로 대관해서 파티를 하고 있어서 입장을 하진 못했다. 오전에 다시 오니 다시 시민과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물가의 도시 인상에서 예상한 것과 달리 꼭대기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와 모든 시설이 무료였다. 기피시설을 이렇게 힙한 공간으로 꾸며놓은 아이디어, 그리고 그걸 실행해 내서 이런 결과물을 세웠다는 것이 놀라웠다. 언덕이 없는 코펜하겐인지라 이런 인공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특별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점심을 먹으러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보이는 버거/샌드위치 체인에 들어갔는데 사먹은 버거들이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훌륭한 점심으로 덴마크에 대한 좋은 기억을 작게나마 하나 추가했다. 구글맵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달리다 보니 갑자기 배를 타게 되었다. 자동차채로 배 안에 들어가고, 독일까지 건너가는 동안 갑판 위에서 마지막으로 실컷 바다를 구경했다. 맥주도 한 잔 했다. 모든 탈 것 위에서 마시는 맥주란 맛있지만 특히 맛있는 것은 배 위에서 마시는 맥주다. 함부르크 공항 쪽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니 좋은 호텔을 예약했다. 사우나랑 실내 풀도 있는 곳이지만 이용을 할 시간은 없었다. 대신 맛있고 싼 독일 맥주를 실컷 마시고 근처에 전통적인 레스토랑에서 비교적 싼값에 배도 든든히 채웠다. 호텔과 레스토랑 사이에 꽤 넓은 숲길을 지나가야 해서 좋은 산책은 덤이었다.
다음날 조식 든든히 먹고 호텔을 떠나 집에 오는 길에 잠시 함부르크 하퍼시티에 들렀다. 수로 사이사이 지어진 웨어하우스들의 풍광을 감상하고 맛있는 홍콩음식 사먹고 복잡한 도시를 빠져나와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집에 도착했다. 총 4박 5일의 짧고 굵고 목적이 확실했던 여행이 끝났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진짜 올 지 - 아프거나 할 수 도 있으니까 - 티켓은 어떻게 사는지 등 사전 조사를 철저히 안 하고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는데 어떻게 다 아다리가 잘 맞아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면조와 음악 듣고 따라 부르며 하는 로드트립은 즐거워서 이 여정을 좀 쉽게 만들었다. 오는 길에 오 년 넘게 쓴 차내 휴대폰 거치대가 망가져버리는 바람에 잠깐 이 차와 함께한 세월, 여행 등등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거치대는 더 마음에 든다. 우리 차 오드리도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