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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근황과 잡생각

귀여운 노릉이의 그림자

계절성 우울증이 찾아오는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헬스를 시작한 지 일 년을 슬쩍 넘겼는데 요즘 매우 게을리하고 있다. 주 2회 정도 가서 예전의 70% 정도만 하고 온다. 작년 이맘때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시점이려나. 아무튼 지금보다는 훨씬 더 활기차게 보냈던 것 같다. 요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귀찮다. 이제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조차 없다. 쉬어야 내일 또 일하지, 생업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게 어디냐 싶은 수준이다. 괴로운 노동의 나날을 버티게 해주는 이야기가 담긴 책, 영화, 드라마나 기타 관심사에 푹 빠져있을 정신적 체력도 바닥이다. 그냥 누워서 봤던 만화책을 또 읽거나 주제가 너무 무겁지 않은 영화를 보는 정도가 한계다. 어제는 랜덤 한 주민들을 인터뷰하던 유퀴즈의 초창기 에피소드들의 하이라이트 편집본을 네 시간가량 멍하니 봤다. 사람 사는 이야기라 재밌게 오래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뭔가를 오래 본 것도 오랜만이다.

 

성장의 증거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게, 이런 시기를 보내는 자체로 불안함을 느끼던 시기에는 이 무기력한 상태 + 불안함 + 자책 = 우울감 지속 및 가중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쉬운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불안함과 그로 비롯되어 이어지는 자책은 하지 않는다. 근 몇 년간의 나를 돌이켜보면 계절성 우울증은 매년 앓고 있고, 그 대표적 증상이 무기력증임을 알게 되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만 증상이 완화되고 좀 더 활기찬 일상을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병원을 찾아 약을 타먹자니 독일에서는 약 대신 또 다양한 허브티나 추천받을 것이 예상된다. 찬란하고 바쁜 하절기가 지나고, 날이 쌀쌀해지고 일조량이 현저히 줄어들고, 삶의 패턴도 약간 바뀐다. 이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나라면 그냥 이런 나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면 될 일 같기도 하다.

 

2016년부터 작년쯤까지 우리 둘 다 목표지점을 설정해 두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기를 보냈다면, 요즘은 다시 반복되는 노동자의 일상으로 돌아와 어느 정도 적응한 현업에서 오는 피로와 권태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편해진 몸과 지루해진 머리로 하릴없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게 된다. 계획 먼저 하고 실천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적은 별로 없지만, 늘 바라던 것과 너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풀리는 것 같다가도, 또 바라던 바대로 얼추 비슷하게 살아지고 있었음을 문득 뒤돌아보면 깨닫기도 하고 그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바라는 바'가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앞길을 비추울 것이냐이다. 7년 전에 내가 가진 아이디어와 그에 대한 이유는 제법 확고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아는 정보의 양과 방향이 달라지면서 내 생각도 많이 변했다. 이제 오래전에 설정한 바라는 바에 대한 그림을 좀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사실 생각할수록 지겹다. 미래에 대한 꿈이나 계획을 수정한다고 해도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늘 계획을 실행시키는데 필요한 돈과 지위, 인맥등이 부족하다고 툴툴대지만 사실 부족한 것은 인내심과 꿈까지 가는 지지부진한 길을 즐겁도록 착각하게 만드는 영리한 계획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애쓰는 타입과 살아지는 대로 좋은 해석을 하는 타입이 있다면 우린 둘 다 전자에 가깝기 때문에,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지쳐서 때려치우지도 않고 슬렁슬렁 바라는 모습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기획력과 실행력이 간절하다.

 

오늘은 가뭄의 단비 같은 공휴일이다. 독일 통일기념일이다. 한국도 통일을 해서 공휴일이 하루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한국이 통일을 한다면 사람들의 지독한 차별주의와 늘어난 부동산투기의 재료들로 인해 또 내 나름대로 마음이 괴로울 일이 많겠지만 그래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본주의맛 좀 수백 년 봤다고 모든 가치의 중심을 각자의 금전적 이득에만 두고 평화에서는 멀어지는 선택을 매번 하는 것이 더 괴롭다. 매번 분단된 나라 둘 중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이 능력 없는 것들 아직도 구시대의 진영논리가 의도적으로 갈라둔 이념에서 못 벗어나고 두 나라의 리스크를 장기적 안목에서 줄일 수 있는 통일도 못했냐'하는 뜻으로 물어봤을 리는 절대 없지만, 그래도 묻는 사람이 통일을 경험한 독일 어르신들일 때마다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건 있다.

 

오래간만에 휴일에 집에서 쉬면서 글을 쓰니까 좋다. 10월도 주말마다 있는 약속들로 바쁠 예정이지만 그래도 쉬는 날이나 한가한 오전에 글을 좀 써야 할 텐데.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생각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생각을 짚어가면서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글쓰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