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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목욕이 너무 좋아

한국에 오면 꼭 하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판데믹 시절에 목욕탕들이 영업을 안 해서 작년에야 처음으로 갈 수 있었다. 올 해도 한국에 오면 하고 싶은 것 목록을 작성하며 잊지 않고 '목욕탕 가기(가능하면 세신 도전)'을 써놨었다. 독일에도 사우나가 있지만 한국의 목욕탕과는 좀 다른 맛이다. 따뜻한 온탕물에 들어가 앉아있다가, 냉탕물에서 몸을 빠르게 식히고, 다시 온탕물에 들어가서 짜르르하게 온기가 몸에 스며드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시설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거칠거칠한 타월로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아내는 행위는 아무래도 서양국에선 하지 못하겠지.

 

목욕탕에 가는 것은 추운날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찬바람 쐬고 목욕탕까지 걸어가서 입장료를 내고 탈의실로 들어가면 나는 목욕탕 특유의 사우나 같은 냄새와 촉촉한 온기에 몸이 녹는다. 이 '아 따뜻하다'하는 느낌이 벌써 엄청난 위안감을 준다. 입장료를 내면 건네받는 빳빳하게 작은 수건 두장을 보니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놀러 온 친구가 나보고 왜 이렇게 작은 수건을 쓰냐고 했던 게 생각나서 웃겼다. 심지어 내가 집에서 쓰는 수건은 한국의 목욕탕 수건보다 두 배이상 큰 수건인데도. 옷을 벗고 목욕 도구를 챙겨서 탕 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고, 머리 감고 샤워를 꼼꼼하게 하고, 기대하던 온탕으로 들어간다. 열탕 근처에 자리를 잡으면 너무 뜨거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몸을 서서히 덥히면서 따뜻한 공기를 추가로 쐴 수 있다. 나는 온탕에 앉아서 욕탕 위 천장에 맺힌 물방울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뜨끈한 온탕에서 몸이 덥혀질 때 천장에서 떨어진 약간 시원한 물방울을 맞으면 기분이 좋다.

오늘은 엄마랑 어릴 때 갔던 아주 오래된 목욕탕에 일부러 찾아갔다. 이 곳은 욕조의 깊이도 다른 곳보다 낮아서 딱 적당하고, 천장이 낮고 물방울이 잔뜩 맺혀 있는 곳이다. 내가 고개를 치켜들고 구경하고 있으니까 옆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도 너무 예쁘지 않냐며 함께 감상하셨다.  난 한국 아줌마들이 너무 좋다. 특유의 명랑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한국 아줌마답게 좀 더 명랑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냉탕과 온탕을 두 번 정도 왔다 갔다 했다. 천장의 물방울과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멍하게 쉬는 시간을 가졌다. 요즘같이 스크린이 오만 곳에 있고, 각종 볼거리, 들을 거리로 가만히 쉴 때가 없는 시절에 목욕탕이란 공간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완전히 전자기기가 없는 욕탕 내부에서 어느 정도 몸을 불릴 시간 동안 탕 안에 가만히 있으려면 멍하니 있는 법을 터득하거나 아니면 머릿속에서 스스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정말 훌륭한 명상이 아닌가? 피부에도 좋고 혈액순환에도 좋고. 멋진 라이프스타일이다.

오래된 목욕탕에 간 덕분에 입장료를 현금으로만 결제해야 해서, 세신을 받아보려고 인출했던 3만원 중 8천 원을 썼다. 그래서 25000원인 세신을 받을 수가 없었다. 약간 다행이기도 하다. 조금 무섭기 때문이다. 어릴 때 엄마가 때를 밀어줬었는데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남이 밀어주는 것을 아직 신뢰할 수 없다. 다들 좋다고 하고, 나도 이제 어른이니까 견딜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 도전해보려고 했지만 오늘은 돈이 부족해서 실패다. 내년에 다시 도전한다. 그때도 이 목욕탕이 여전히 영업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작년에 갔던 옆동네의 오래된 목욕탕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곳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엄마와의 추억이 있는 곳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스스로 몸을 닦을 때는 한 번도 줄줄 때가 나오도록 박박 민적은 없다. 사실 박박 밀어도 나오지 않는다. 더 세게 밀면 아마 피부가 너무 아플 것 같다. 그런데 어차피 매일 샤워를 하니까 딱히 많이 나올 것도 없을 것 같다. 대신 정말 꼼꼼히 닦는다. 우리 고양이들이 자기 몸을 그루밍하는 것을 보면 매우 놀라울 만큼 꼼꼼하게 천천히 공들여서 몸을 닦는데,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도 손가락에 힘을 살짝 줘서 구석구석 닦아낸다. 손가락 사이사이, 발가락 사이사이를 닦을 때는 특히 고양이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닦는 부위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내 버릇 중 하나다. 엄지발가락, 새끼발가락, 복숭아뼈, 발꿈치, 아킬레스건, 종아리, 정가이, 무릎, 무릎아래, 햄스트링,... 이 또한 훌륭한 명상법 중 하나인 바디스캔이 아닌가? 내 몸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구석구석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경우가 흔치 않다. 목욕은 참으로 우아하고 건강한 방법의 자기애적 행위이다.

 

목욕이 끝나면 나와서 찬물을 한 잔 따라 마신다. 오래된 목욕탕엔 일회용 종이컵 대신에 귀여운 다회용 컵이 쟁반에 올려져 있다. 이런 점도 사랑스럽다. 머리를 말리면서 주변을 찬찬히 구경하니 단골들의 목욕바구니가 여러 군데에 있는 선반들을 꽉 채우고 있다. 이 분들이 계속 단골로 계신다면 내년에도 영업을 하고 계시겠지? 온탕 안에서 담소를 나눈 아주머니가 '원래 목욕탕에 오면 아이들 울음소리가 나야 하는데, 고령화 사회인게 실감이 나요'하며 쓸쓸해하셨다. 사실 아이가 있는 요즘 엄마라면 이렇게 오래된 목욕탕엔 안 데리고 올 것 같기는 하다. 시설이 오래되어 엄청 깔끔해 보이는 건 아니고, 사실 목욕탕이란 곳 자체가 분자나 세포단위로 위생에 신경을 쓰는 초청결한 사람의 기준에는 썩 안전하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샤워를 하고 들어가더라도 모르는 타인과 탕의 물을 함께 쓴다든지 하는 공공장소니까. 아무튼 내가 아이일 때는 이 목욕탕에 엄마와 왔었다. 엄마가 너무 세게 피부를 문질러서 울기도 했었다. 목욕탕들에 커피우유 같은 것을 납품하던 엄마는 고객사(?)인 온 동네의 목욕탕들을 돌아가며 이용하셨고, 우릴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그중에 타일이 예뻐서 좋았던 곳들을 몇몇 기억한다.

 

모든 걸 마치고 아주 개운한 기분으로 나와서 찬공기를 쐬니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한국에 온 다음날에도 다른 목욕탕에 갔었는데, 그날은 그렇게 춥지 않아서 약간 아쉬웠다. 대신 그 날 목욕 마치고 동네 맥주집에서 한 잔 마신 생맥주가 기가 막힌 맛이었지. 오늘은 시간이 좀 일러서 맥주 대신에 어묵꼬치를 하나 사먹었다. 국물 한 모금, 오뎅 한입 베어 물고 씹다 보면 겨울의 아름다움이 미각세포에서 시작해서 온몸으로 전해진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과 만원 미만의 돈으로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동네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다시 방문할 때까지 많이 그리울 것이다. 뭐 독일에서도 사우나 한 두 번 정도 가면 되긴 해. 독일식 사우나도 그 나름대로의 멋짐이 있다. 목욕 마치고 마시는 맥주의 맛도 훨씬 안정적이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