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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지겨움을 참고 그냥 하기

지겨움을 참고 일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는 내 옆자리 고양이 노르망디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일이 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본심이니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일이 하기 싫다. 일 자체는 좋아한다. 집안일도 좋고 정원일도 좋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의 일은 목적이 너무나 아득하다. 하나하나의 타스크를 살펴보면 내가 즐기고 잘하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 회사에게 더 큰 수익을 가져다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방식은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거시적인 목표는 프로덕 개발 프로세스조차 자동화를 많이 시켜서 중단기적으로 나 같은 개발팀원의 수를 줄여나가기 위함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들어갈 무덤을 스스로 정성스럽게 파고 있는 것이다. 매 달의 월급을 위하여.

언젠가 레이오프 될 미래와 다음 밥벌이에 대한 걱정보다는 이런 일을 뻔뻔하게 시키는 경영진과 그 똑똑한 사람들이 다같이 모른 척하며 진행하는 현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무력감이 일을 하기 싫게 만든다.

 

요즘 늘 하는 생각은 '그래서 다음엔 뭘 하지?' 이다. 거대한 소프트웨어 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은 이 회사를 마지막으로 그만하고 싶다. 물론 그러고 싶다고 해서 미래가 그렇게 하도록 나를 내버려 둘 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지금부터 애를 써서 그만두고도 잘 사는 미래를 만들고 싶다. 이번 한국방문을 계기로 잊고 살던 것을 깨달았는데 지금의 나는 내 인생의 싸이클로 볼 때 필연적으로 권태를 느끼게 되는 시기에 머물러 있다. 유학, 새로운 회사의 적응기를 거쳐 이민 초반기를 훌륭히 넘기고 안정적인 구간에 접어들었다. 한국에서도 안정적인 시기를 3년 이상 못 버텨내고 '뭐 또 새로운 거 없나'를 찾아 두리번댔던 것 같다. 지긋하게 커리어의 한 우물을 파는 것은 나로선 너무나 어렵다. 하게 되면 너무나 재밌을 것 같은 일들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메모해야겠다. 미래에 대한 즐거운 상상은 현재의 지겨움을 버티게 해 준다.

 

또 하나 현재를 그럭저럭 지낼만하게 해주는 것은 각종 취미이다. 나는 취미가 많다. 시시때때로 바뀌고, 한 시기에도 여러 개를 한다. 일단 행위적으로 분류를 해보면 먹고 마시는 것을 신중히 선택해서 섭취하는 행위 중 정말 오랜 기간 푹 빠져 있는 것은 잘 볶아진 좋은 원두를 사서 각종 추출법이나 레시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이다. 슬슬 차에도 관심이 많아졌지만 하루치 카페인을 커피로 거의 채우고 있기 때문에 차는 카페인이 없는 차 위주로 마셔서 아직 취향의 폭을 쉽게 못 넓혀가고 있다. 운동은 최근에는 좀 시들해졌지만 헬스와 요가를 좋아하고, 이번에 한국에서 아빠랑 남동생이랑 친 당구가 너무 재밌어서 여기서도 당구장을 알아놨다. 나그네를 설득해서 삼구를 연습해야지. 쉬는 시간이 좀 생기면 일하는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학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하고 있던 생각을 끄고 뇌를 잠깐 환기시키기에 좋다. 책은 요즘 SF를 주로 읽는다. 어렵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많지만 상상력이 거대하고 흥미로운 류츠신의 삼체를 꾸역꾸역 읽고 있다. 만화책은 최근에 한국에서 사 온 슬램덩크를 단숨에 다 읽었다. 평소에는 요리만화를 즐겨 읽는다. 그리고 읽으며 얻은 아이디어로 직접 요리해 먹기도 좋아한다. 이번달까지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는데 재밌는 밀린 시리즈들을 하나씩 본다. 최근 나의 고민과 연관이 있는 다큐멘터리 '일'을 인상 깊게 봤다. 영화 '더 킬러'도 재미있었다. 오래간만에 이름난 감독의 재밌는 영화를 보니 좋아했던 감독의 필모를 훑고 싶어 진다. 아빠랑 남동생이 내 브이로그를 재밌게 본다는 것을 알고 하나 후다닥 찍어 만들어 올렸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원래 1-2년에 하나 만듦) 만들어야겠다. 주말마다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볼 일로 바쁘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여행에 대한 욕구는 별로 없다. 삶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흘러간다.

 

오늘도 일을 해야 한다. 이미 오전업무가 시작되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 정성껏 할 것이다. 잘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이 나랑 내 주변인에게 별 의미를 갖진 못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동료들은 도울 수 있고 매니저는 좋아할 테니까. 부품으로 사는 거 너무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