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을에 여행을 떠난다. 벌써 수년째 그러고 있다. 휴가라고 부를 수 없는 길고 피로한 여행을 주로 가을에 간다. 여름휴가에서 모두 돌아왔을 때, 나 하나쯤 쉬어도 많은 사람들이 업무에 익숙해져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때, 수많은 여행지가 비수기로 접어들었을 때, 아직은 낮에 해가 따뜻할 때 나는 여행을 한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 토론토, 몬트리올, 뉴욕,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아와지 섬, 대만 곳곳, 방콕, 제주도 그리고 서울. 가을의 풍경으로 기억에 남은 수많은 여행지가 떠오른다.
올 해는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을 해서는 안되는 가을이다. 하지만 아픈 엄마와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미루기엔 기약이 없고 엄마와 나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 많은 고민 끝에 결국 가게 되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길고 피로한 여행을 다시 떠나자니 마음이 착잡하다. 독일에 온 뒤로 한국행이 한 번도 가볍게 느껴진 적이 없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온한 일상을 뒤로하고 가야만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결국은 이 시간에 고마워하게 될 것임을 안다.
이번 여행 내내 지낼 숙소를 예약했다. 굉장히 작은 원룸이다. 약 3주간 재택근무도 그 곳에서 할 것이다. 프리랜서로 오래 살았으니 이런 식의 리모트 근무는 익숙하긴 하지만 이 곳 회사와 동료들의 양해로 이렇게 공식 리모트 근무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언젠가 오래전에 꿈꾸던 디지털 노매드의 삶이기도 하다. 게다가 안정된 월급도 보장이 된다. 하루하루 열심히 버텨왔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삶과 세월은 그래도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 준 것 같다.
옆구리에 따뜻한 요를을 끼고 그르릉 울림을 느끼며 이 일기를 쓰고 있다. 넓고 싸늘한 집에서 고양이들과 의지하며 지내는 이 온기가 많이 그리울 것이다.
가을이고 서울이 그리운 마음에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던 시절에 자주 듣던 음악을 듣고 있다. 장필순, 이상은, 이소라, 언니네 이발관,... 난 계절성 우울감 때문에 가을을 좋아해 온 것 같다. 모순된 말이지만 사실이다. 이 우울감이 있어야만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드는 감정들이 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그것들이 더 깊이깊이 침투하게 된다. 그 와중에 타지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으면 그야말로, 음악 감상을 위한 완벽한 세팅이 된다. 내 고향 서울에서 혼자 잘 지내보자. 2주간 자가 감금과 3주간의 시차를 지닌 리모트 근무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