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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자가격리가 너무 좋다

일 시작 전에 노트북 세팅해놓고 아이패드로 드라마 감상 중

격리 12일 차. 며칠 안 남았다. 그리고 격리가 끝나는 것이 아쉬울 만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격리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준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되새겨 볼까 싶어서 일기장을 열었다.

 

드라마 진정령

듣던 대로 미친 드라마고, 심각하게 재밌었다. 출연진들의 저세상 미모가 초반의 알쏭달쏭함과 지루함을 버티게 해 준 계기가 되긴 했지만, 스토리와 극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어지간하면 추천하고 싶다. 가끔 특수효과 후처리가 너무 뜬금없을 만큼 촬영분의 퀄리티를 깎아먹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긴 하다. 단순히 퀄리티가 낮은 합성을 했다는 의미가 아닌, 누끼가 제대로 안 따여 있다던지, 크로마키가 인물의 일부를 먹었다던지... 그래도 이건 그냥 산업형 병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노력했다. 반면 극의 진행이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자잘한 갈등은 시원하게 처리하고 넘어가버리고, 큰 갈등 줄기 위주로 풀어져 나가는 대작의 상쾌함이 있었다. 미스테리한 사건들이 모여 추리의 매듭을 지어나가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멈출 수가 없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달리게 되었다.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던데, 과연 나도 마지막 화를 끝내자마자 다시 1편을 틀게 되더라.

50부작을 순식간에 다 봤고, 급기야 원작 소설도 읽기 시작했다. 뭔가 이젠 이걸 보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느낌을 언제 또 마지막으로 받았었더라? 기억 안 난다. 드라마 감상 자체의 몰입도는 왕좌의 게임 정주행 할 때처럼 강력했다. 생각해보면 난 판타지를 참 좋아한다. 에스에프도 좋아하고, 무협도 좋아. 배경이 현재 내가 살고 있기에 차갑고 묵직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가 아니면 깊게 몰입 하기가 더 쉬워진다.

배달 서비스

이런 것까지 다 배달이 되는구나, 싶은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슈퍼, 편의점, 각종 생필품, 의류, 레스토랑 배달음식, 커피, 디저트 등으로 단 한 번도 문 밖에 나갈 필요가 없는 삶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선택지는 너무나 다양하고, 시간대조차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새벽 배송이란 게 너무 궁금해서 한 번 시켜봤다가 새벽 4시에 문 앞에 놔두고 가시는 소리를 듣고 심경이 좀 복잡해 지기는 했다. 내가 뭐라고 새벽에 남을 일하게 만드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 은혜로운 서비스를 누리고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양도 많고, 하나같이 맛도 좋아서 행복하다. 게다가 각 회사마다 서비스가 약간씩 달라서 사용자 경험 리서치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런 정보는 이렇게 확인하게 만들었구나, 저런 것까지 알려주는구나 등 눈여겨봐 둔 것들은 나중에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수수료를 생각하면 조금 착잡해지기는 하다. 음식 하나가 나에게 배달되기까지 원재료 생산자부터 레스토랑의 주인, 주문 플랫폼, 라이더,...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거쳐 내 한 몸 굉장히 편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포장용 쓰레기를 잔뜩 버리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저런 거 생각하느라 경험하는 것을 포기했을 나라서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만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거 독일에선 없어서 못 누린다. ㅜㅠ

트위터

골방 안에 틀어박혀서도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않는 이유는 역시 트위터나 각종 소셜 미디어로 연결되었단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에 본 소셜 딜레마라는 넷플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미디어의 장점에 낚여 시간과 관심을 낭비당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그렸더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장점이 간절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는 바빠서 신경을 쓰지 않고 살던 카카오톡 단체방의 대화도 유난히 더 재밌었다.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회사 동료들과도 가끔은 일부러 비디오를 켜고 대화를 한다. 포스트 코비드 시대에 내게 있어 소셜 미디어는 정말 정말 훌륭한 자기표현 수단이자 소통 수단의 대체품이 되었다.

수리야나마스카라

수리야나마스카라, 태양 경배 자세 시퀀스는 팔 굽혀 펴기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운동이어서 좁은 원룸에서 지내는 동안 운동을 쉬지 않게 하는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머리가 멍하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 유산소 운동으로 땀을 빼고 나면 한결 개운해지는데, 공간 등의 핑계로 그걸 멈추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유투부에 이걸 같이 수련할 수 있도록 영상을 올려준 분들께도 감사하다. 혼자서도 잔잔한 음악 같은 거 틀어놓고 할 수는 있는데, 역시 누군가가 같이 힘들어하며 템포 알려주는 영상을 따라 하는 편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목표한 횟수를 마치기에 유리하다. 그리고 역시 몸을 움직여야만 소화도 되니까, 맛있어 보이는 배달 음식들을 하나라도 더 시도해 볼 수 있게 도와줬다.

 

 

이제 슬슬 격리 이후에 해야 할 일처리나 일정들을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다만 이번 주말에는 외주 마감도 있고 마도조사도 읽어야 하고 바쁠 것 같다. 이렇게나 알차고 즐거운 격리 생활을 보내고 나니 아픈 엄마와 지친 아빠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조금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덕분에 한국 생활 동안 지낼 수 있는 내 방이 있는 점도 참 좋다. 그렇다. 난 자가격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