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어른이 된 이후로는 다음 달에도 내가 숨 쉬고 걸어 다니며 살아있는 것을 확실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아졌다. 계약한 회사에서 주 40시간 일하기, 집세와 각종 공과금을 잘 챙겨서 내기, 체력과 컨디션 유지를 위해 운동과 위생관리 하기, 기타 등등. 그 외에 의식 있는 시민으로서 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위들도 있다. 외국어 연습하기, 세계 주요 뉴스 업데이트 하기, 매력적인 외모를 갖추기 위해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하기, 환경에 덜 해를 끼치는 방법을 찾아보고 실천하기, 소셜 모임에 참석하기 등. 사실 이런 것들만 해도 하루하루가 굉장히 바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굳이 내게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것들은 진짜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고 났을 때의 보상을 위해서 할 필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들은 뭘까? 취미라는 단어를 써서 꾸준하고 열정적으로 하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서 보상과 관계 없이 하는 것들이 결과적으로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을 풍미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어제 우리팀 프로덕트 오너가 잠시 나를 방문했다. 하이델베르크로부터 그래도 4-50분을 달려 일부러 찾아와 주었다. 2월 이후 처음 만나는 거고 정말 반가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본인의 지난 3주간의 휴가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인간에게 휴가는 왜 필요한지, 천국과 같지만 곧 지나가버릴 요즘의 날씨를 우리가 얼마나 만끽해야 하는지 같은 지극히 유럽인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나도 그것들을 공감하고 있다. 일과 성취가 곧 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인이 일을 안 하고 살 수도 없는 것이고,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정말 힘들고 어느 정도의 성취가 필요하다. 그냥 필요조건일 뿐이었다. 내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것도 좀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나를 위해 기꺼이 하게 되는 것들. 그리고 그렇게 꽉 차게 살다가 휴가를 통해 쉼을 경험하고, 다시 반복하고, 그렇게 살다 보면 갈 날이 오겠지... 아무튼 해야 하는 것 외의 것도 더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내겐 그런 것들이 뭐가 있는지 다시 떠올려 보고 싶다.
책을 보거나 영화, 시리즈를 보는 것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난 내 취향이 딱히 대중적이지 않음을 인지하고 살아왔기에 내가 선택해서 보는 것들은 정말로 내가 보고싶어서 보는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아무리 친구들이 재미있게 보고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해도 나는 꿋꿋하게 굳이 보지 않아 왔다. 웃긴 건 그걸 이제야 하나씩 보고 있다. 왕좌의 게임, 빅뱅이론 같은 것들. 프렌즈는 아직도 한 번도 본 적 없다. 수많은 히트한 한국 드라마들도. 안 본 게 대다수다. 책은 딱히 누가 잘 추천하지도 않거니와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서 화제의 신작이나 베스트셀러 같이 남이 골라준 책은 읽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좋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것을 덜 게을리해야겠다.
글을 쓰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렇게 온라인에 일기를 쓴 것은 정말 정말 오래되었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5학년 때 첫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콘텐츠는 쭉 각종 형태의 일기였으니까 이십 년이 훨씬 넘게 쓰고 있다.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를 쓰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매일 썼다. 살면서 미처 또는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한 내 생각들을 일기장에 적어내려 갔다. 눈치 봐서 분위기를 깨지 않는 말만 하고 대부분의 말은 속에 담고 사는 편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문화에서, 일기장에 쓸 말과 생각은 마를 일이 없었다. 일기를 쓰던 사람이다 보니 다른 형태의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도 적었다. 대학 다닐 때 리포트도, 취미로 써보던 시나리오도, 간행물에 들어갈 칼럼도, 언어 인증을 위해 써야 했던 쓰기 시험도, 심지어 논문까지, 쓰는 것 자체에 대한 괴로움은 없다. 쓰는 것이 좋다. 일기와 짧은 이야기를 더 자주 써보려고 해야겠다. 정말 나를 많이 채워주는 확실한 연습 중 하나다.
맛있는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관심과 집착도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요즘에는 체력과 함께 소화 능력과 알콜 분해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조금 시큰둥해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는 사람에 비하면야 여전히 적극적으로 맛있는 것을 찾고, 기회가 되면 먹어 볼 것을 기록하고는 있긴 하다. 전과 달리 요즘에는 어느 맛집의 잘하는 쉐프가 만드는 음식보다는 단일 식재료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 같다. 치즈나 커피, 맥주같이 아예 연구가 꽤 오랫동안 진행된 식재료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사보고 하면서 감각적 욕구보다 지적 욕구를 채우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는 환경에 맞춰 변화한 듯하다. 이 부분에 있어선 내 관심사와 즐기는 방식의 흐름을 가끔 제삼자가 된 것처럼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사는 환경에 따라 바뀐 것 중에 또 하나는 식물을 심고 돌보는 것이다. 이사를 비교적 자주 다녔던 서울에서의 삶, 어리고 뭔가를 계속 배워야 하던 임시의 삶을 벗어나 이제는 한 집에 4년 이상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근 3-4년간은 굳이 이사 나갈 이유가 없는 안정된 삶의 단계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작년쯤부터 식물을 하나 둘 들이기 시작했다. 매년 봄이 되면 각종 허브의 씨를 뿌려서 재배해 먹기도 한다. 이건 취미라고 부를 수준의 것은 아니지만 매일 들여다보고 물 주는 시간만큼 내 관심과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맞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따라서 즐겁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곧 겨울철이 오면 그 즐거움을 대체할만한 것이 필요하려나.
게임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게임에 푹 빠져 있다가 빠져나왔을 때, 뭔가에 대한 성취를 위해 더 이상 게임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중독이 심해서 시험공부하다가도 게임하고 그랬으니까. 다행히 그걸 최근까지 잘 지키다가 닌텐도 스위치를 사고 나서 다시 시작되었다. 약간 다행인 점은 온라인게임과 달리 누군가와 같이 플레이 함으로 인한 시간의 굴레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덕분에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하기도 하고, 좀 우려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이젠 손목이나 척추 경추의 컨디션에 따라 어차피 그렇게 오랫동안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눈도 뻑뻑하고, 심지어 두어 시간 집중해서 하고 나면 머리도 안 돌아간다. 게임하면서 내게 일어나고 있는 노화를 격감하고 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퍼즐 같은 게임 자체의 콘텐츠와 그걸 전달하는 방식, 디자인, 게임성을 위해 추가한 다양한 요소 등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다. 야숨 프리퀄 나오기 전에 가논 잡아야지.
일기 쓰는 중에 대학원 친구가 오랜만에 이 동네에 방문해서 집 근처를 지나가다가 발코니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나눴다. 정말 반갑고 즐거운 깜짝 방문이었다. 가끔 같이 산책할 동네 친구가 있는 삶도 참 좋을 텐데. 좀 더 집 밖 친화적인 취미도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