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넘게 일기를 쓰지 않았다. 토막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일기장 앞에 고요하게 앉아서 생각을 다듬어 써내려 갈 기회가 없었다. 아무래도 면조가 방학을 해서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적어졌다. 재택근무를 한다고 해도 그만큼 더 게을러졌기 때문에 시간이 많아지진 않았다. 풀타임 근무 후 저녁식사를 위해 요리해서 치우고 나면 더이상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뭔가를 생각 할 두뇌 에너지가 남지 않는다. 그래서 운동을 가까스로 하고, 나머지 시간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흘려보낸다.
8월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행히 별 일이 없었다. 평일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는다. 주말에는 장을 보거나 필요한 외출을 하고, 혹시 약속이 있으면 사람을 만난다. 내가 직접 나서서 약속을 잡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 된 것 같다. 약간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구지 타인을 만날 이유를 이제 생각 할 수가 없다. 이런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이벤트 하나에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대면으로 만나게 될 경우 리모트 환경에선 안 써도 되는 각종 에너지를 쓰기 때문인데, 이 것도 근육처럼 안쓰다 보면 약해지나보다. 표정, 목소리의 크기, 상대의 눈과 표정을 살펴 해석하는 비주얼적 자극 등, 신경을 더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내향적인 인간에게 소셜 디스턴싱은 마음 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가끔씩 벌어지는 이벤트가 더 부담으로 다가오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8월 말에는 1주간 휴가를 썼다. 푹 쉬는 휴가는 아니고 잠깐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룻밤 검은 숲으로 캠핑을 다녀왔다.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단 하루 뿐이었지만 그동안의 삶이 단조로웠기 때문에 상당한 환기가 되었다. 그 주말에는 면조 친구 커플이 놀러와서 2박 3일간 신나게 술을 마시며 다양한 술 이야기를 많이 했다. 초면인 타인과는 차라리 이렇게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놀면 재미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다들 공통된 관심사를 먼저 찾는거겠지.
9월이 되자 약간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여름이 끝나고, 이제 완전히 한 해의 3분의 2가 지나가버린 때. 서늘해진 공기가 계절성 우울감을 운반해오기도 했다. 내키지 않는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고, 9월 한달도 누군가와의 약속을 지키다보면 금새 가버릴 것이다. 원래는 이 때 한국에 가려고 했지만 결혼식 참여 후 격리 및 지켜보는 기간 없이 비행기표를 사기엔 리스크가 있어 보여서 조금 미뤘다. 한국행 항공편, 숙소, 휴가와 재택근무 등 평소 방한보다 더 신경써서 일처리를 해 놓고 나서 아빠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기뻐하셨다. 수많은 걱정거리를 품고 골치아프게 결정한 한국행인데 먹고 싶은 것 생각해놨다 말하라는 아빠의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얼떨떨하고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한해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안도감에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면조와 저녁 먹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하나씩 이야기 해 보며 나는 운좋게도 안전하고 편안한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름대로 힘든 점도 있고 매일 투덜대고 있지만, 이보다 더 나쁠 수 있는 가능성에 불안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닥치지 않은 잠재적 불행을 잠시 무시하고 현재의 고요함을 즐길 수 있는 단단함을 가지고 싶다. 이렇게 써두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