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는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 때문에 영화관에 거의 가지 않았다. 라라 랜드, 어벤저스 두 편, 기생충 정도만 영화관에서 본 것 같다. 근방 도시 만하임에 멀티플렉스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 원어 상영을 하는 곳은 아주 제한적이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체념하게 되었다. 영화는 가급적 영화관에서 보고 싶어 하는 나의 영화 감상률은 뚝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아주 작은 노트북 화면 아니면 오래된 빔 프로젝터를 고생고생 연결해서 봐야 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아닌 이상 그 수고를 잘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패드 프로를 샀을 때도 이것으로 영화나 드라마 감상이 쉬워지리라 예상했는데, 밥 먹을 때 틀어놓는 수준의 가벼운 영상물 외에는 잘 감상하지 않는다. 지난달 티비를 산 뒤로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아무래도 영화를 감상하는 기쁨을 다시 천천히 찾은 데에 있는 듯하다.
화질도 중요하고,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운드 문제가 해결되었다. 내가 산 티비가 사운드 감상에 특화된 모델은 아닐지라도 기본적으로 출력이 굉장히 좋고 내가 가진 블루투스 스피커보다는 훨씬 선명하고 해상도 높은 소리를 내어준다. 지난주에는 반지의 제왕 감독판을 정주행하고, 주말동안에는 많은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정말 재미있다. 노트북이나 아이패드의 작은 스크린으로 볼 때는 자세도 불편하고 백그라운드에서 다른 프로그램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집중을 잘 할 수 없었는데, 티비는 확실히 영상감상을 목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가전인만큼 그에 특화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어서 쉽게 몰입하게 도와준다. 여기서 다시금 장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야기로의 몰입은 빔프로젝터로 쏴서 보는 편이 더 잘 되는 부분도 있긴 한데, 내가 가진 빔의 한계상 설치-연결-재생중 내뿜는 뜨거운 바람, 소음 등의 불편한 요소가 수반되어서 잘 안꺼내 쓰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제대로된 작품 감상을 위해서는 티비가 훨씬 훌륭한 어플라이언스다. 나는 기술 발전에 크게 반감이 없는 인간임에도 이를 인정하는 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니 좀 웃긴 일이다.
영화를 감상할 때는 아무래도 나와 작품의 거리가 중요하다. 작은 스크린과 잘 들리지 않는 대사, 주변 효과음은 그 거리를 늘려 놓는다. 하릴없이 더 비판적으로 보게 되고, 이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고 하지 못하게 만든다. 반면 영화관에서처럼 내 시야에는 작품 안의 장면만이 보이고, 이야기 속에서 들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때엔 난 캐릭터들과 함께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그 경험이 하고 싶어서 영화를 계속 보게 되고 좋아하게 된 것인데, 지난 몇 년간은 그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 투덜이 스머프인 내 본성이 그대로 깨어 있는 채로 비판적으로만 바라보았고, 심지어는 트위터에 투덜대면서 보면서 영화에는 절반밖에 집중하지 않기도 했다.
이쯤 되니 지난 수년간 노트북이나 작은 스크린을 통해 반쪽짜리 감상을 했던 작품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특히 그중에서 내가 재미없고 집중이 잘 안된다고 느낀 작품들을 장비를 바꿔 다시 본다면 다른 감상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지의 제왕 감독판을 볼 때에도 느꼈는데, 한 편의 4시간이 넘는 대작의 트릴로지를 한 번에 상영하는 이벤트에 간 적이 있었다. 난 그 정도 팬은 아닌데 아마 친구 중 한 명이 날 설득해서 함께 갔을 것이다. 영화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고 스토리도 좋아하지만 결과적으로 난 2편 두 개의 탑에서 잠이 들어서 편안한 극장 의자에서 3편이 끝날 때까지 중간에 화장실도 안 다녀오고 내리 꿀잠을 잤다. 내가 좀 집중력이 떨어지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 걸로 봐서는, 애초에 인간에게 12시간의 연속 집중력을 기대하는 것은 조금 너무한 기획이었던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영화관에서 꿀잠을 잔 전적이 여러 번 있는데, 트랜스포머 같은 기술 과시형 영화를 볼 때는 늘 15분 정도 가장 주요한 액션신에서 푹 잔다. 그 외에도 술 마시고 차가 끊겨서 첫 차 기다리느라 들어가서 본 심야-새벽 영화들은 거의 다 클라이맥스쯤에서 숙면을 취했다. 하지만 티비를 통해 내가 재생한 블루레이를 볼 때는 언제든 멈출 수 있다. 잠깐 딴생각 하느라 중요한 대사를 놓쳤다면 1분쯤 앞으로 돌려 다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12시간 넘는 작품을 일주일동안 쪼개서 볼 수 있었고, 덕분에 피곤해서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대부분의 씬을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인해서 티비를 통해 영화감상을 하는 편이 더 좋은 감상을 할 수 있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컨텐츠 스트리밍 기술과 티비의 결합은 정말이지 훌륭해서 퇴근 후 오후를 몽땅 티비 앞에서 보내게 만든다. 아직 티비를 가진 지 채 한 달이 안되었는데도 벌써 이렇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서 음악도 티비로 틀고 있을 정도니까.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지만, 앞서 말한 좋은 점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서 딱히 불평불만을 할 수도 없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한동안 한 적 없던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단 생각을 하게 만든다. 티비가 대체할 수 없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의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부분이 그립다. 티켓을 예매하고, 상영일을 기다려서 영화관이 있는 도시까지 옷을 차려입고 가는 경험 같은 것들이 그리운 것 같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부담스러운 때 여서도 그렇고, 딱히 자막도 없기 때문에 초집중해서 영어를 들으며 감상해야 하는 부분이 부담스러워서도 아직 실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더욱 그리운 마음이 애틋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