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이 너무 하기 싫었다. 구매니저와의 끝나지 않은 악연이 매일의 일과를 정말 더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6월 초, 가장 바쁠 때 휴가를 간 동료의 일을 커버하느라 일더미에 깔려 3주가량을 보냈고, 그 뒤에는 그동안 제쳐 두었던 내 일을 하느라 바빴다. 떨어진 체력, 무기력함과 싸우고, 갑자기 닥친 판대믹 상황에 안절부절하면서 보낸 반년이었다. 후반부 시작하기 전에 휴가라도 좀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9월에 한국 가려고 아껴 두었던 것인데, 좀 떼어와서 3일 휴가를 썼다. 딱히 여행을 갈 상황도 아니고 계획 없이 쉬고 싶어서 쓴 휴가이기 때문에, 집에 머물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미루고만 있던 창고와 주방의 선반들, 그리고 옷 정리를 하기로 했다. 모티베이션을 얻기 위해 일을 하던 월, 화요일에 퇴근 후 집 정리 영상도 몇 개 보았다. 옷 정리는 역시 마리에 콘도의 방법이 좋다고 생각해서 넷플릭스 시리즈에 있는 에피소드도 한 편 보았다.
첫날, 옷 정리
버려야 할 옷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려면 가지고 있는 옷을 전부다 한 곳에 쌓아놓고 시작해야 한다는 팁을 얻었다. 그래야 쇼크를 받고 물건을 줄여야 한다는 마음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것. 원래 팁이라는 게 알고 있을 순 있어도 실천하는 적은 드물다. 그래서 이번엔 실천해보기로 했다. 싱클 침대 두 개를 붙여 둔 커다란 공간에 내가 가진 사계절 옷과 외투, 속옷, 양말 등을 다 쌓아보았다. 예상대로 침대 위 공간을 옷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계절마다 즐겨 입는 옷이 몇 벌 되지 않고, 그나마도 요즘에는 집안에만 있으니 잠옷과 실내복 밖에 입지 않는다. 버릴 옷은 버리고 살짝 빡빡해져 가는 서랍장 공간을 확보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막상 시각적인 쇼크도 받고 심기일전해서 옷 정리에 임했는데도 많은 옷을 버리진 못했다. 일단 몇 벌 이하로 줄여야 한다든지 하는 목표가 없었고, 지난 1년간 한 번이라도 입었던 옷은 제외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데 손이 잘 안 가서 아까웠던 옷들을 지난 1년간 한 번씩 착용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단호하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외로 75%의 옷들은 다 잘 입고 있는 것들이었다. 외출복과 실내복의 비율이 반반 정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편한 원피스 한 벌과 3년쯤 전에 친구가 작다고 줬는데 촉감이 별로라서 입은 적 없는 스웨터를 버렸다. 그 외에는 찢어졌는데 수선하기엔 애매해서 입지 않는 옷들을 버렸다. 천이 예뻐서 뭐라도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하며 잘 접어 보관하던 것들인데 지금 살면서 부족한 것도 딱히 없으니 그냥 버리기로 했다. 오래된 브라도 두 개 버렸다. 이제 브라를 거의 착용하지 않으니까. 내년쯤에는 브라탑이나 브라렛도 잘 안 입게 된다는 데이터를 만들어서(?) 버려버리고 싶다.
둘째 날, 창고 선반 정리
둘째 날은 잠을 늘어지게, 정말 최대한 늘어지게 푹 자고 일어나서 오후가 되어서야 슬슬 움직였다.
창고 선반에는 각종 잡동사니와 공구, 소모품, 청소용품, 식료품, 라면, 고양이 습식 박스, 자주 안 쓰는 주방용품을 보관 중이다. 최근 한 달 정도는 선반 아래 바닥에 까지 물건이 쌓이고 있었다. 목표는 물건들을 한 층씩 꺼내서 선반 바닥을 닦고, 물건들을 잘 정리해서 넣어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보통 소모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버릴 것은 많이 없을 것 같았고, 예상대로였다. 비닐이나 쇼핑백 같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네거나 할 때 한 번씩 더 쓰고 버리려고 보관 해 둔 일회용품 중에서 낡아 보이는 것만 몇 개 정리했다. 일반 쓰레기나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 버리는 용도로 쓰려고 한다. 그 외에는 질서 정연하게 테트리스 쌓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어서 비교적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창고 바닥에 물건이 없으니 약간 넓어 보인다.
마지막 날, 주방 선반과 싱크대 서랍 정리
원래는 어제 주방 선반까지 정리를 하고 오늘은 주방 서랍장과 서류와 교재, 프린트물들 정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휴가답게 느긋하게 움직이다 보니 마지막 날인 오늘에서야 주방 선반 정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주방은 매일 사용하고 매일 청소를 어느 정도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대청소할 때에는 표면도 닦고 있으니까 오늘은 평소에 자주 손대지 않는 싱크대 서랍장 안과 벽면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선반의 물건들을 끄집어내서 청소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 하고 나니까 은근히 힘든 작업이었어서 3시 전에 시작했는데 6시가 된 시점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목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선반 위 물건들을 한 층씩 다 꺼내서 먼지를 닦고, 바닥을 닦고, 바구니나 컨테이너에 담긴 것들을 빼내서 컨테이너를 닦는 것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유통기한 지난 식료품들을 버리고, 덜어 쓰는 찻잎, 조미료 통들을 채워놓았다.
물건들 정리를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골고루 잘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사는 국가를 바꿔 이사 오면서 비행기를 탈 때 추가 금액 없이 가지고 올 수 있는 무게에 맞춰 가진 살림살이들을 정리할 때 아마도 처음으로 미니멀한 삶을 경험했던 것 같다. 또 독일에서 구한 1 베드룸 아파트에서 물건이 별로 없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는 경험이 좋았어서, 뭐 하나를 살 때 많이 고민해보고 사 왔다. 이런 4년여의 훈련을 통해 내가 필요한 것은 다 갖추면서도 구석구석 뭐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과 관리가 용이한 수준까지만 물건을 갖고 있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실 유학생이던 2년간은 이가 없어서 잇몸으로 살아야만 했던 적도 많은데, 돈을 벌게 된 지금에도 물욕과 수집욕이 있는 내가 폭주하지 않고 잘 참고 살게 된 것은 지난 몇 년간의 경험 덕분인 듯하다.
지난 3일간은 공식적으로 일을 안 해도 되는 유급 휴가였기에 이러한 집안일 노동도 6시쯤까지만 하고 쉬었다. 덕분에 약간 더 정리된 집을 결과물로 갖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8월 말에 또 휴가 썼는데 이 때는 좀 계획을 세워서 교외로 나가 자연이라도 구경하고 좀 더 기분전환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