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졸업전시 준비를 치열하고 신나게 했던 친구가 문득 졸업 한 지 10년이 되었다는 소리를 흘렸다. 돌이켜보니 정말 10년이 흘렀다. 나는 2년 휴학을 해서 총 6년 대학생의 신분이었으니까 16년 전에 이미 대학생이었다. 맙소사. 물론 시간이 무작정 빠르게 흐른 것만은 아니고 그동안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나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길고 긴 세월이 흘러 버렸다니. 그저 놀랍다.
아직 어리고 뭔가 정해진 게 별로 없을 때 학부생활은 기존에 가졌던 것보다 큰 자유였고, 난 대학공부가 너무 좋았다. 대학교에 와서야 비로소 공부가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좋아하는 과목은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아무래도 시험기간에 맞춰 결국은 암기 위주로 익혀야 해서 그 부분이 너무 괴로워서 공부 자체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단지 엄마랑 선생님이 요구하는 커트라인을 넘기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대학교 공부는 전혀 달랐다. 시간표를 거의 내 마음대로 짤 수 있다는 것은 파격적인 자유였다. 특히 교양이 좋았다. 아무래도 전공은 필수 과목도 있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순 없었으니까. 교양은 4가지 분야였나?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이 분야 중에 하나씩만 꼭 포함해서 들으면 되었고, 선택지도 꽤 넓어서 좋았다. 컴퓨터를 잘하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특기였으니까 수강신청도 늘 성공해서 듣고 싶은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은 다 들었던 것 같다. 심지어 교양이나 타전공 교양과목을 더 듣고 싶어서 한 학기에 19학점만 들어도 되는데 점수를 잘 받아서 23학점까지 높여 들었다. 교양과목들이 너무너무 좋았다.
연극의 이해, 영화의 이해, 철학의 이해, 기초 법률, 현대인의 다이어트, 초급 일본어, 심리학 개론 등 당시의 수업 분위기나 내용까지 기억나는 것들 외에도 뭐가 많았다. 다른 친구들은 점수를 받기 쉬워 보이거나 친구랑 같이 듣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난 철저히 땡기는 것 위주였다. 덕분에 동물생명과 과학인가? 충격적으로 재미없는 강의를 듣고 인생 최저의 점수를 받기도 해 봤다. 그리고 타전공 (주로 예문대 안에서였지만) 교양과목도 많이 들었는데 덕분에 시나리오, 사운드 디자인, 광고 기획 등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배우며 다양한 꿈을 꿀 수 있었다.
첫 전공 학부를 졸업한 뒤로는 어쩌다보니 이렇게 내키는 대로 뭔가를 공부할 틈이 잘 나지 않았다. 애초에 공부에 진득한 취미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만 공부를 대했기 때문에 학부 때 듣던 교양 수업이 유일하게 순수하게 즐겁게 공부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시험도 대체로 다 잘 봤다. 어차피 전공은 실기로 평가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서 상대적으로 공부가 약간 도피처가 되었던 것 같다. 때로는 도무지 모르겠는 미적 기준 같은 애매한 가치랑 싸우는 작업보다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외워서 쓸 수 있게까지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일하다가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공부만 해야 하는 것이었고,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도 높지 않았고 무엇보다 흥미가 별로 없는 전공을 해야 하니까 했던 거라서 좀 더 괴로운 지점이 많았다.
오늘은 게임 하면서 넋 놓고 시간 보내는 것을 안 하려고 아이패드 켜서 스케치하고 강의 영상도 좀 보고 하다 보니 이때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면 어떤 분야의 입문에 해당하는 넓고 얕은 방대한 지식을 한 학기에 걸쳐 배우는 기회는 정말이지 인생에서 드문 것이었다. 그게 특히 전공이나 밥벌이랑 관련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마 생산 활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준의 재력을 가진 뒤에는 다시 수능을 보던(봐야 하나?)지 편입을 하던지 해서 이런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있을까? 한낱 꿈같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