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비를 샀다.
중학생 때 즈음부터 티비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20여 년을 티비 없이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아니다, 사실은 2년 정도 캐나다에서 지낼 때 티비가 있었다. 하지만 정규방송이 나오도록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은 일체형 dvd플레이어만 이용한 티비였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dvd플레이어에 화면이 달린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때를 제외하고는 내가 브라운관을 들여다보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영화 보는 것을 많이 좋아하고 즐겼었고, 딱히 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방송엔 관심이 없었다. 대학교 다닐 때 무한도전을 재밌게 보기는 했었지만, 티비로 본 적은 없다. 아무튼 티비는 나에게 있어 필수품도 아니었거니와 오히려 사고 싶지 않은 가전제품 중 하나였다. 일단 크고 검은 물체가 집안에 하루 종일 놓여있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티비를 볼 공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공간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티비를 대체할 수단이 많았다. 빔 프로젝터, 커다란 아이맥, 왜 이렇게 많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는 랩탑, 아이패드, 플러스 사이즈 아이폰,... 내 집엔 솔직히 말해 스크린이 너무 필요 이상으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비를 샀다.
이 것은 명백히 스위치에서 파생된 추가 지출이다.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저스트 댄스를 좀 더 큰 화면을 보면서 하고 싶고, 젤다를 어지럽지 않게 플레이하고 싶어서 큰 스크린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밍도 도와주었다. 자툰에서 지난주 월요일까지 전자제품에 붙는 19% 부가세를 빼주는 이벤트를 했다. 그렇다 독일에서는 전자제품에 세금이 19%나 붙는다. 아무튼 처음에는 큰 모니터를 사고 싶었다. 일 할 때 세컨 모니터로도 쓸 수 있도록.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티비를 사버렸다. 그것도 55인치 거대한 스마트티비를 샀다. 00유로만 더 주면 화면이 한 단계 커지고, 00유로만 더 주면 디자인이 나아지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프로모션에 놀아난 것은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도 티비가 있는 삶을 한 번 살아보게 되었으니 경험 값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티비선을 연결하지는 않았다.
아마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독일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정규 방송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무선인터넷에 연결하니 넷플릭스, 유투브, 아마존 프라임, 라쿠텐 티비 등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를 즐길 수 있고, 가지고 있는 스마트 기기로 에어플레이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볼 수가 있다. 독일 방송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보고 싶단 생각도 당연히 없으므로 굳이 티비선을 연결할 이유가 생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선도 안 샀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본래의 바람대로 저스트 댄스랑 젤다랑 동숲을 큰 화면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티비 앞에 쇼파를 가져다 놨는데 정말 편하다. 사실 티비를 설치하고, 앉아서 볼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집안 구조를 한바탕 뒤집어엎는 쁘띠 이사를 한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도 다 설치하고 나니 제법 영화나 게임을 안락하게 즐길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욕심 같아서는 러그 하나 깔고 싶지만 고양이 털 청소가 어려우니 포기한다. 없던 티비가 생김으로 인해서 역시나 공간의 우아함(같은 게 있었다면)은 좀 사라졌다. 하지만 확실히 영화를 볼 때 집중이 잘 되고, 배우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게 된 것은 큰 이득이다.
스마트티비는 아예 다른 물건이었다.
아이폰이 더이상 전화기가 아닌 휴대성 좋은 컴퓨터이자 각종 센서와 뛰어난 카메라 기능까지 갖춘 똑똑한 생활의 동반자가 된 것처럼, 인터넷 연결과 어플을 통해 온라인 컨텐츠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된 스마트 티비도 내가 알던 기존의 티비와는 다른 무언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연하게 시큰둥했던 다른 사물인터넷 기계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스마트 냉장고, 기능 많은 오븐, 쿡 칩 있는 써모 믹스, 스마트 홈 시스템 같은 것들. 이미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온 똑똑한 기기들을 써보고 싶어 졌다. 어쨌든 나도 디지털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며 기술의 발전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인데 너무 안일하지는 않았나 싶은 생각도 좀 든다.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동안은 이런 게 사치였으니까.
아무튼 내게 있어 티비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너무 잘 쓸 것 같기 때문이다. 단 일주일 만에 유투브 영상을 아이패드나 폰으로 보는 것은 답답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티비의 단점에서 비롯된 가장 큰 장점은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영상과 트위터를 동시에 띄어놔서 둘 다 제대로 보지 않던 나의 나쁜 버릇을 당분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스마트폰만 멀리 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