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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사과와 커피와 생활동반자


화요일이다. 출근 전에 아침밥으로 사과와 커피를 먹는다. 비타민을 섭취하고 비타민 흡수를 방해하는 카페인을 함께 먹는다니 조금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배고프니까 먹는다. 먼저 출근하는 남편과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면서 짧고 굵게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에 대해 상의했다. 대부분의 경우 장을 같이 보고, 요리나 집안일을 둘 다 주체적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 남편과의 대화 주제로는 생활에 관련된 것이 가장 좋다. 커리어, 전공분야에 대한 지적 쾌감, 페미니즘이나 레이시즘에 대한 이야기는 남편과 할 수 없다. 그런건 친구들이랑 하는거다. 만난지 10년, 결혼한지 7년이 넘은 남편과는 이제 더이상 친구관계는 아닌 것 같고, 가족이지만 유아기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가족에 대한 느낌은 쭉 변해왔으니까 이 관계를 가족느낌이라 하기도 좀 그렇고, 내 생각에는 법 이름이지만 '생활 동반자'라는 말이 딱인 것 같다. 


오랜 시간 같이 살다보니 같이 공유하는 부분도 되게 많고, 반면에 절대 공유가 안되는 부분도(가령 남편이 즐겨하는 게임이라든지, 내가 좋아하는 추리소설 이라든지...) 반드시 존재한다. 이제는 둘이 비슷한 수준으로 관심을 갖는 분야를 발견하는게 조금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전에 넷플릭스 드라마 방랑의 미식가와 샐러리맨 칸타로의 달콤한 비밀을 둘이서 되게 재밌게 봤는데, 뭐 먹을 것 관련한 컨텐츠야 둘 다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연출이 약간 오바스러운 일본 드라마는 사실 남편보단 내가 더 취향인데도 결국 둘 다 끝까지 재미있게 봤다. 속으로 '아 그래도 덕후 출신이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Odd한 것에 조금 더 열린 마음은 아무래도 어릴 때 그런 취급을 받아 본 사람이 안 그런 사람들보다 좀 더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과와 커피를 먹으면서 든 생각인데, 둘 다 따로 먹을 때 잇점이 많은 건강에 좋은 과일과 음료지만 둘이 같이 먹으면 묘하게 그 잇점을 100% 누릴 수는 없다는 점이 꼭 결혼해서 남편과 사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폭발시키기에는 사실 비혼인 편이 효율적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저질러 버린 뒤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조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 둘이 서로와의 관계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늘 그럴 수는 없더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지 부귀영화는 아니었다. 요리를 하고 싶을 때 2인분을 조리해서 누군가랑 같이 먹는 것, 단순하고 평범한 이 경험이 주는 만족도는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의 뿌듯함, 만족감과 비슷한 레벨이다. 꼭 결혼을 할 필요까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에 와서 다른 커플들을 보다보니) 가끔 성가시기는 해도 흉금을 터놓고 같이 살아도 안전한 생활 동반자란 되게 필요한 존재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