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삶이란 소설을 다 봤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던 어제는 독일에서는 휴일이라 슈퍼마켓도 다 닫고,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는 날이었다. 휴일 기분에 젖어서 나도 낮잠 늘어지게 자고 게으르게 보냈다. 논문도 아예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이러면 안되지만, 그냥 쉬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땀 흘리며 운동도 한 뒤, 새로산 스크럽제로 목욕도 길게 하고, 팩 붙이고 누워서 음악도 들었다. 청소도 안했지만 혼자 지내다 보니 집이 아직 깨끗했고, 세탁기는 돌아가고 있어서 그나마 집안일에 대한 죄책감은 덜었다. 뜨게질을 하다가 오랜만에 했더니 금새 손이 아파와서 관두고 책을 읽었다.
너무 아름다운 책이었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가 일종의 실험으로 다른 사람 행세를 한 이른바 필명이다. 사실 이 작가의 기행에 대해 들어는 봤고, 워낙 유명한 사람임은 알았던 것 같지만 책을 읽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팬이 많거나, 또는 묘하게 헌신적인 팬이 있는 작가의 작품은 쉽게 건드리기 꺼려진다. 작품 자체 보다 그 작가가 가진 매력이 베스트 셀링의 요소가 된다고 멋대로 제단해 버려서일까. 게다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작가여서 더더욱 손이 안갔다. 나는 뭐 하루키나 아니면 추리소설이나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비뚤어진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인 좋은 이야기였고, 글이 되게 담백하면서도 가시적이라 푹 빠져들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다.
중 후반부에 끈질기게 어린 소년과 그 소년을 키워 준 노인이 죽어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2018년 서울에 살고 계실 뿐, 소설의 배경이 되는 60년대 파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치를 받고, 생활하고 계신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곧 잃게 됨을 알고서 매 순간을 그녀를 위해 보내려 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아빠와 우리 가족이 보이기도 했다. 물론 현실은 소설과는 다르니까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해 내기는 불가능 할 것이다. 그래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 지에 대해 늘 고민이 많고, 답을 찾아 해매였는데, 그냥 이렇게 자기 앞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최대한 지켜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인정하면 너무 무기력해져서 슬펐는데, 그나마 재능있는 작가가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낸 이야기를 읽고나니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병은, 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가장 괴로운 것 같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고, 기적을 믿어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태평함이 부담스럽다 못해 원망스럽기까지 한 요즘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언젠가 찾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