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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휴식의 일월

오늘 아침으로 먹은 군고구마와 카페라떼

한 오 년 만에 군고구마가 먹고 싶었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 지는 며칠이 지났지만 오늘 아침에야 오븐에 넣고 구워 먹었다. 알루미늄 포일로 감싸서 낮은 온도로 40분 초벌구이(는 어제 해뒀다), 센 그릴모드로 돌려가며 30분을 더 구웠다. 고구마 하나 익히는데 쓰는 에너지가 너무 많다. 그래도 먹고 싶었던 것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은 삶의 낙 중 하나다. 아침에 고구마를 구웠더니 온 집안에 향긋한 군고구마향이 지금까지 풍기고 있다. 역시 굽기를 잘했다. 정말 맛있었다. 독일에서 구할 수 있는 고구마는 전분보다는 섬유질이 더 두드러지는 빨간 속살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고구마에 비해 당도가 떨어지는데 구웠을 때 향은 못지않게 좋고, 목 막히는 느낌이 덜하고, 원래 너무 단 것은 별로인 나는 이 쪽을 더 좋아한다.

 

최근에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 대체로 겨울철의 나는 그런 것 같다. 특히 이번 일월은 자기개발에 대한 강박관념을 미뤄두고 좀 쉬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책도 많이 읽게 되고, 일기도 쓰고(여기에 쓰는 긴 글 말고 손으로 쓰는 5년 일기장이 있다), 저녁에는 드라마를 보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이 너무 좋아서 그냥 앞으로도 쭈욱 이렇게 살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보니 최근에 본 드라마 두 개에 모두 암에 걸려 시한부로 살 수밖에 없는 여자주인공들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지금 읽고 있는 소설에도 남자 등장인물 한 명이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의 생의 끝이 가까워 오는 이들이 내리는 결정, 심정의 표현 등이 중요한 이야기의 소재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런 상황을 가정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드라마 '서른, 아홉'은 면조와 함께 보고 있다. 보면서 나보고 버킷리스트가 있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그런 게 없다. '지금은 안/못 하지만, 죽기 전엔 꼭 해봐야지...' 하는 게 과연 있을까? 어차피 죽을 건데 여태까지 굳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해 보는 경험이 큰 의미가 있나 싶다. 다행히 나와 달리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제법 의미있고 멋진 할 것들을 찾아낸다. 나는 오히려 이 일월의 나처럼 살고 싶다.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레시피를 찾아서 장을 봐와서 만들어 먹고, 일기를 쓰면서 현재의 나를 내 시점에서 기록하는 것에 만족한다. 병이 있다면 내가 느끼는 병의 진행 상태를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아플 때, 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서 그 누구도 알아주거나 하지 못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엄마의 상태와 감정이 궁금했지만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마당에 캐묻는 것은 어려웠다. 질병의 진행도 신체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고 이야기다. 이걸 찬찬히 관찰하는 자세로 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과거 또는 미래에 사로잡혀 살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현재를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기 위해 하는 노력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미래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차라리 어느 만화에서처럼 내게 남은 시간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무튼 현재로서는 미래지향적인 생활습관을 억울해하지 않고, 좋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절약하는 생활, 공부하는 생활, 에너지를 아껴 쓰는 생활, 채식을 하는 생활, 운동을 귀찮아도 꾸준히 하는 생활을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월의 마지막 주는 친구들과 스키장에 가기로 예약을 해 뒀다. 많이들 '재밌겠다'라는 반응을 해주지만, 나는 스키를 잘 타지도 못하고 좋아한다고 볼 수도 없다. 산에 가는건 좋지만 고양이들을 남에게 맡기고 8박이나 그것도 타인과 한 집에서 외박을 하고 싶지 않다. 친구들을 만나는 건 좋지만 하룻저녁 재밌게 노는 걸로 충분하다. 스키 슬로프도 한국과 달리 확확 단계가 높아지는 것 같던데, 무섭다. 대신 이번엔 레슨을 예약했으니 그나마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에는 약간의 의의가 있다. 내가 잘하는지 못 하는지, 열심히 한 하체 운동이 도움이 될지 안될지 등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가 되겠지. 아무튼 정말 가기 싫다. 그래도 거의 일 년 전에 예약까지 해 둔 거니까 가야 해. 다시는 내키지 않는 여행 약속을 등떠밀려 잡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