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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이사갈 집을 찾았다.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노르망디가 쇼파 위에서 혼자 빛나고 있다.

독일에서의 이사는 정말 어렵다. 특히 내가 원하는 일정 조건을 갖춘 집을 만나는 건 어렵다 못해 인간의 노력 이면의 신 또는 운의 영역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조건의 집이 나와도 그 집에 방문예약 신청서를 보내고, 연락을 받아 약속을 잡고, 집을 보면서 인터뷰를 하고, 최종적으로 집주인이 나를 선택하기까지 많은 관문이 있다. 지원자로서 일종의 '결격사유'가 없는 편이 아무래도 인터뷰의 기회가 많이 올 것이다. 우리는 제법 큰 결격사유 중 하나인 '외국인'으로서 남들보다 약간 더 실패를 맛봐야 했다.

집을 사려다가 포기한 이유

나와 면조는 작년부터 immobilienscout24, immowelt, meinestadtde, ebay kleinanzeige, wg gesucht 등의 앱을 전부 깔아두고 새로 올라오는 이 동네의 모든 매물들을 체크했다. 올 초에는 고양이들과 함께 사는 외국인을 받아주는 집주인이 너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아예 집을 사버릴까 생각했다. 은행에 다니는 지인을 통해 대출 상담도 받고, 따로 온라인으로 찾은 중개인과도 상담을 몇 차례 했다. 그런데 판데믹 이후로 집값이 무섭게 치솟고 있는 것이 그래프로 보였고, 실제로 매주 새로운 매물이 올라올 때마다 집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체험했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집의 가격이 부담이 되어서 하루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은행과 상담을 한 뒤에 전화를 걸면 그 집은 이미 팔려 있는 경험을 두어 차례 했다. 또한 이곳에서는 집을 사고팔 때 드는 부가적인 비용- 공증비, 취득세, 중개인 수수료,... -이 대략 집값의 10~15% 정도 따로 든다. 우리는 집을 사더라도 언젠가 집을 팔고서 이사를 하게 될 가능성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집값의 대략 30%에 해당하는 부가비용을 써버리게 된다. 집값이 오르더라도 그 정도로 치솟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큰 비용 부담이고, 30년 이상의 장기대출을 받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도 있어서 결국 구매는 포기하기로 했다. 집을 살 때 쓰는 부가비용만으로 1-2년 치의 월세를 내고 좋은 집에 살 수 있다고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내가 살고 싶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은 2ZKB (2개의 방, 주방, 욕실) 아파트로 2개의 방이라고 쓰여있지만 한국식으로는 1 베드룸 아파트다. 지은 지 120년 정도 된 건물인 알트 바우(고건물)로 이 건물에만 총 10가구가 산다. 우리 집이 아마도 이 건물에서 가장 작은 아파트고, 한국식 2층에 있으며, 1층에는 인력회사 사무실이 있다. 알트 바우의 특징은 높은 층고와 두꺼운 벽으로 이게 꽤 큰 장점이다. 여름에 비교적 시원하고, 인테리어에 큰 투자를 하지 않았는데도 웅장한 멋이 있다. 이 집에는 또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굉장히 큰 테라스가 딸려 있다.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64㎡의 작은 아파트지만 테라스(평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덕분에 전혀 답답하지 않게 럭셔리한 기분을 느끼며 살 수 있었다. 이사를 가게 되면 이 집이 가진 모든 장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포기한다면 높은 층고만 포기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알트바우가 가진 단점도 꽤 많아서 가능하면 2000년대에 지어진, 최소한 1980년대 이후에라도 지어진 집으로 이사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 집에서도 꼭 필요한, 이 집에서 내가 좋아했던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넉넉한 야외공간 (테라스, 발코니, 정원,...)
  • 큰 창문
  • 세탁기와 건조기를 같이 둘 수 있는 공간이 집 안에 있을 것
  • 욕실과 주방에 창문이 있을 것
  • 롤라덴(창문 외부에 설치하는 차양막)이 있을 것
  • 너무 높은 층에 위치하지 않을 것 (1~2층을 선호, 특히 지붕 아랫집은 절대 안 됨)

그리고 이 집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아쉬웠던 부분을 보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할 것 - 지금 집은 기차역 바로 옆, 시내 중심에 있어서 편리하지만 매우 시끄럽다.
  • 집 앞 주차장 - 지금은 반호프(도보 5분 거리)의 공용주차장을 임대해서 쓰고 있다.
  • 식기세척기를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주방
  • 100㎡ 전후의 집 - 방이 최소한 한두 개는 더 있어서 내 홈오피스, 손님방을 만들고 싶다.
  • 욕조
  • 너무 많은 가구가 살지 않는 건물 (아파트일 경우 6가구 미만 선호)
  • 적어도 1980년대 이후에 지어진 집 - 고속 인터넷 라인, 제습 설계 등의 이유

이렇게 기준을 정해두고 찾다 보니 조건에 맞는 집이 의외로 거의 없었다. 내가 사는 도시는 1-2차 대전도 피해 간 살아 숨 쉬는 니벨룽겐 역사의 도시이기 때문에. 1950년대에 지어진 건물도 '새 건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1901년에 지어졌지만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고, 16세기에 지어진 집들이 길게 늘어선 골목도 있다. 결과적으로 찾는 우리 쪽에서도 까다롭게 스크리닝을 하고, 우리 마음에 들 만큼 좋은 집을 내놓은 집주인들은 경쟁자가 많기 때문에 까다롭게 세입자를 고르다 보니 우린 약 9개월간 이사 갈 집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만 믿어. 반드시 찾을 수 있어."

근거가 없다는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일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을 때, 면조가 저런 말을 했다. 파트너로서 의지가 되는 말이다. 그만큼 책임감과 의지를 가지고 임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책임감, 의지랑 운이 만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온다. 반복되는 실패에 의기소침해져서 인터넷에서 좋은 매물을 찾게 될 것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매일 앱을 체크하던 것을 멈췄을 때, 면조는 저 말에 책임을 지고자 계속해서 틈만 나면 확인을 했었나 보다.

 

지난 일요일 아침에 내가 늦잠 자는 것을 알면서도 면조가 건 20통 넘는 전화가 날 깨웠다. 방금 올라온 매물이 있는데 사진도 없고, 이메일에 답장도 없어서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았다며, 나보고 저녁에 바로 다녀오라고 했다. 목소리에 확신이 느껴져서 나도 적잖은 부담을 가지고 알려준 주소로 방문했다. 일렬로 같은 디자인의 작은 집들이 여러 개 붙어있는 Reihenmittelhaus였고, Psychotherapist인 노부부가 사무실 겸 거주공간으로 사용하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집을 볼 때 조건만 맞으면 면조보단 훨씬 관대한 내가 보기에 굉장히 아늑하고 느낌이 좋은 집이었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다 있었다. 무엇보다도 거실 창문 앞에 고양이들과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는 근미래의 내 모습이 상상이 되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집주인들과 달리 집 설명과 투어를 마친 뒤 거실 식탁에 앉아서 나에 대해 그리고 집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하셨고, 대화를 많이 했다. 짧은 독일어로 복잡한 상황(내 거주 비자, 직업, 배우자의 상황 등)에 대해 설명하기가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집주인으로서 듣고 싶은 부분(소득의 안정, 집 관리 좋아하는 것,...)과 걱정할 수 있는 부분(고양이 ㅠ)을 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매우 마음에 들어서 당장이라도 계약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남편을 통해 전화로 질문을 더 하고 싶다고 했고, 그분들도 흔쾌히 받아들이며 가급적 남편도 같이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면조가 전화로 내가 미처 못 물어봤던 것들을 질문하고, 그분들이 내 설명으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잘 설명한 후 두 분을 만나기 위해 일정을 조정해서 수요일 오전 시험이 끝나는 대로 바로 와서 저녁에 두 번째 미팅을 하기로 했다. 오는 기차 안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둘을 매력적으로 포장해서 팔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과연 그날 저녁에는 마치 능력 있는 영업사원이 된 것처럼 목소리와 말투에 자신이 넘쳤고, 유창한 독일어로 우리가 왜 이 집에 딱인 세입자인지 집주인 두 분 앞에서 훌륭한 피칭을 했다. 친절하지만 깐깐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도 청소가 주 업무고 어지간한 고장은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브라우어의 강점을 설명할 때 눈을 반짝이셨고, 독일에 40년 산 벨기에 출신 주인아저씨는 한국 사람들은 원래 다 이렇게 설득력 있고 친절하냐고 물어보셨다. 무엇보다 시험기간 중에 일부러 바이에른에서 여기까지 본인들을 만나러 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필사적인 마음을 느끼셨던 것 같다. 주말까지 생각해보고 대답을 준다고 하셨는데, 헤어진 지 30분 만에 전화가 오셨고, 다음 주에 우리와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

완벽하진 않지만 딱 내가 바라던 삶을 살 수 있는 집

이 집은 이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원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그 공원으로 산책을 갈 때마다 이 근처에 살게 해 주세요 하고 허공과 내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빌어왔었다. 뿐만 아니라 집이 있는 골목길을 나와 길만 건너면 바로 와인 밭이 시야 가득히 펼쳐져있다. 정원이 앞과 뒤에 있어서 할 일은 좀 많아 보이지만, 주인 부부가 17년간 애지중지 심고 길러온 예쁜 정원을 물려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원 관리에 대한 공부를 0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큰 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게 되는 거실엔 겨울철을 쉽게 보내게 해 줄 벽난로가 있다. 내가 바라던 위의 모든 조건들과 더불어 추가로 얻게 되는 멋진 점들이 굉장히 많다. 물론 약간 애매한 지하 공간이라든지, 티비 둘 곳을 아직 모르겠다든지 하는 이른바 단점도 있다. 그래도 이런 건 내가 그린 큰 그림에서 사소한 디테일일 뿐이니까 살면서 구상해 나갈 수 있다. 오랜 기간 바랐던 나만의 방도 생길 예정이다. 주인아주머니가 프락시스 상담실로 쓰시던 방이다. 큰 책상을 두고 일하다가 발코니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차 한잔 할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작은 방은 손님방으로 꾸며서 여기까지 방문해준 고마운 사람들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공간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조용하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곳에 살면서, 일과 후 산책하고, 주말 내내 정원 관리하는 진정한 독일 노인의 삶(ㅋㅋㅋ)을 살게 될 날이 무척 기다려진다. 이제 난생처음 해보는 본격 이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다행히 작은 집에 살고 있었어서 가구나 가전 개수가 아주 많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