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 정적인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특별히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는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볼 때 특정 이벤트의 발생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리고 아무래도 일상을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기념할만한 이벤트들은 대부분 집을 떠나서 실행이 된다. 여행이나 소풍, 친구들과의 모임, 각종 경조사, 기타 등등.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도 꽤 많지만 다른 평범한 나날들과 배경이 같다 보니 약간 덜 두드러지게 기억되는 듯하다. 올해는 여행이나 소풍같이 자진해서 떠난 휴가가 세 번 뿐이었다. 내 생일 즈음에 다녀온 파리 여행, 여름의 막바지에 1박 2일로 다녀온 숲 속 야생 캠핑, 그리고 가을에 다녀온 한국. 기억할 것이 적으면 그동안 흐른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 세 번만에 추억을 싹 리와인드해 감상하고 나니 한 해가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사실 짧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쁘지도 않았다.
집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교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늘 부담감을 조금씩 느끼는 내게 24시간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아도 전혀 지장 없는 기회가 내 생애에 주어져서 기뻤다. 얼레벌레 취직을 해버린 것 같았는데, 이 어려운 시기에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연초까지만 해도 좀 더 남들이 알아주고, 좀 더 영향력 클 것 같고, 좀 더 스마트하게 일 할지도 모르는 다른 기업으로 이직하고 싶어서 약간 안달이 나있었는데, 그게 좌절된 덕분에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방향으로 사고방식을 고치기도 했다. 올 한 해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회사의 고용안정과 그로 인한 소득의 안정 덕분이다. 깊이깊이 감사하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변화한 생활로 인한 소비 패턴,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옷을 거의 사지 않았고, 여행, 외출, 출퇴근 등 이동에 쓰는 비용도 감소했다. 대신 전열 비나 냉난방, 콘텐츠 구독에 쓰는 비용은 늘어났다. 올 한 해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놀기만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엄청나게 많은 콘텐츠를 소비했다. 독일에서는 잘하지 않는 온라인 주문도 미묘하게 늘어났다. 록다운중에도 문 앞까지 배달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필요하거나 고장 난 물건들을 바로 다시 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남의눈을 많이 신경 쓰는 나는 옷차림에 대한 집착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연습 삼아 한국에 다녀올 때 잠옷 두 벌, 내의 포함 외출복 상·하의를 3벌씩만 가져가서 5주를 살다가 왔다. 줄어든 짐가방만큼 옷차림 걱정도 덜 했고, 몸도 마음도 좀 더 가벼웠다고 생각한다. 대신 잠옷은 좀 많이 산 것 같다. 쇼핑 자체에 대한 욕구는 전혀 줄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아직 지른 건 없지만 빈티지 주방기구나 찻잔 등을 매일매일 눈이 벌게지도록 구경하고 있다.
주거환경 개선에 대한 욕구도 훨씬 더 커져서 티비를 사버렸고, 발코니에 맥주냉장고도 설치했다. 주방 선반과 팬트리 규모가 늘어났고, 식물도 마구 증식했다. 급기야 면조에게서 시작된 이사 가고 싶은 병이 나에게도 조금 옮아서 틈틈이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며 괜찮은 매물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백 퍼센트 내가 내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남의 바람을 들어준다거나 남의눈을 신경 써서 해야만 했던 외출이 확 줄다 보니 많이 애쓰지 않아도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내년에 딱히 바라는 것은 없다.
있지만 굳이 애써서 얻고 싶은 것들인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는 답이 나온다. 지금처럼 안정적인 소득과 마음의 평정과 운동, 식이를 통한 건강유지에 힘쓰고 싶다. 내키지 않는 모임참가 요청을 잘 거절하고 싶다. 요가를 좀 더 잘하고 싶다. 이건 꾸준히 수련하면 가능하니까 애를 쓸 필요는 없다. 독일어를 잘해서 동료들과 독일어로 수다 떨어보고 싶지만 이건 하기 싫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니까 굳이 바라지 않겠다(!). 해야 할 일은 있다. 원래 연말에 어학시험을 봐서 영주권을 취득하려고 했었는데 록다운 등을 핑계로 얼레벌레 미뤄버렸다. 이 것 정도는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