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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불편함이 선물하는 가치라니

커피가 담긴 유리잔과 두 입쯤 베어 먹은 크리스피크림 도넛이 담긴 접시
오뎅전골을 앞접시에 덜어 먹고 있는 장면
맥주를 따라 둔 유리잔과 배경에 보이는 맥주병
마치 정글처럼 우거진 실내 식물들 너머로 보이는 면조
회색의 뿌연 날씨에 발코니에서 찍은 발코니 화분 사진

연말연시를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가 있고, 그래서 회사 일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중간중간 지루할 때마다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뭐 재미있는 것이 없나 기웃기웃 대게 된다. 창고에서 오래 잠자고 있는 dslr카메라를 꺼내서 배터리를 충전했다. 다 충전된 배터리를 끼우니 작동이 잘 된다. 오래간만에 좋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재미있어서 집안 곳곳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동영상도 촬영해 봤는데 과연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보다 심도도 잘 표현되고 운치가 더해진 장면이 찍혔다.

 

찍은 사진을 큰 화면에서 보고 보정도 하고 싶어서 SD카드를 읽을 수 있는 머신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그럴 수 있는 머신이 이제 내 오래된 무려 올해 12살인 맥북프로밖에 없었다. 역시나 잠자고 있던 맥북을 깨워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불러왔다. 외장하드에 복사를 해두고, 요즘 작업용으로 쓰고 있는 회사 컴퓨터에서 열어서 보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뿔싸 지저스 크라이스트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회사 컴퓨터가 블루스크린을 띄우고, 어떻게 해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ㅠㅠ 왜 이런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연말에 주요 폴더만 서버에 백업을 해두기는 했었지만 연초에 작업한 것들이 다 날아갈 위기에 쳐해서 진땀이 났다. 일단은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시도해 봤지만 고칠 수 없으므로 회사 IT기기 관리 부서의 조치를 기다리기로 했다. 결국 12살 먹은 맥북으로 보정을 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너무 느릴 것 같아서 클라우드를 이용해 선별한 사진 몇 개만 아이패드로 불러왔다. 아이패드에 설치된 라이트룸도 아주 좋아서 다행히 만족스럽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이 아닌 것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리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소셜미디어나 내 블로그에 올리기 까지의 과정이 정말 귀찮고 복잡한 것이었구나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체감 귀찮음을 올려버린 사건인, 중간에 컴퓨터 고장 쇼를 겪는 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긴 하지. 며칠 전에 쉽고 편리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 대신 시디를 시디플레이어에 넣어 재생하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기를 썼는데, 이번에는 사진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두 불편한 방식이 가진 아름다움의 공통점이 뭔지 생각해 봤는데, 선별의 과정을 거쳐야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선별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많이 있고, 그걸 하지 않아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단순히 개인이 취미로 접하는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끌리는 시디가 10개 있어도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하루에 2개만 사야 하고, 한 번에 이 곡 저 곡 듣고 싶어도 시디를 갈아 끼는 것이 번거롭고 시간이 들기 때문에 통째로 감상하기 좋은 시디 하나를 고심해서 골라서 트는 편이 낫다. 디지털 사진도 마찬가지다. 한정된 메모리카드 용량에 비해 화질이 좋고 덩치가 큰 사진이 몇(백) 장 보관되지 않는다. 한 번 셔터를 누를 때마다 신중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순식간에 찍을 수 있는 사진과는 다른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사진을 찍게 된다. 후보정과 가공 과정으로 들어가면 더욱 할 일이 늘어난다. 따라서 50번 찍고 싶은 순간에서 막상 셔터를 누르게 되는 것은 10번 정도, 그중에서 마음에 들게 나온 5장만 골라서 보정 프로그램에 띄우고, 그중에서 1장 정도가 정말 마음에 꼭 들게 완성된다. 스마트폰을 통한 디지털 경험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선별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 포인트가 바로 불편함이 가져다주는 선물 같은 재미라고 생각한다.

 

다른 가치관이 앞서 있을 때는 구지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것이나, 무겁고 둔탁한 디지털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고 옮기고 하는 과정이 시대에 뒤떨어진 시간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다시금 이 불편함의 재미에 푹 빠진 나와, 시간낭비라고 여기던 내가 같은 사람이란 것이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