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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태풍이 지나간 날

발코니 의자에 앉아서 조금 격한 바람을 쐬는 중인 요를 ㅋㅋㅋㅋ

강력한 태풍인 사비나가 서유럽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했던 일요일 오후에 발코니를 최대한 정리했다. 날아갈 만한 것이 없도록 들여놓을 수 있는 것은 들여놓고, 그렇지 못하는 것들은 최대한 구석에 옹기종기 겹쳐서 모아놨다. 그 와중에 요를은 신나서 베란다를 뛰어 다니며 바람을 쐬었다. 다른 고양이들은 무서워서 집사 옆에 바짝 붙어서 와들와들 떨었다는데 우리 고양이들은 태풍이 한참 지나가는 오밤중에도 별 생각없이 쿨쿨 잘 자는 것 같았다. 요를이야 귀가 안들린다 치고, 노릉은 밤새 윗집 베란다에서 나는 뭔지 모르는 철같은게 쾅쾅 부딪히는 소리를 어떻게 신경 안 쓸 수 있었던걸까. 평소엔 그렇게 세상 모든 것에 겁을 내면서. 알 수 없다. 그런데 막상 나도 이정도 태풍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한국에서 여름에 늘 오는 태풍이 비바람 동반해서 훨씬 더 고약한 것 같다.

 

아무튼 태풍 핑계를 대고 이틀째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사실 어제는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라디오나 뉴스에서 위험하다고 신신당부를 해서 그냥 안 나기기로 결심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이 재택근무를 해서 딱히 갈 필요도 없었다. 재택근무를 하면 오히려 더 효율이 좋을 때가 있는데 월요일이 딱 그랬다. 보통 월요일에는 다들 일 할 기분이 안나서 그런가 잡담도 많이 하고, 쓸데없이 토론이 길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집에서 혼자 투두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일처리를 하다보니 하루가 끝날 무렵 엄청 많은 일을 했다. 게다가 출퇴근을 위한 시간과 체력을 아낀 덕분에 주 초반에 해야 하는 집안일 등을 월요일에 이미 다 해버릴 수 있었다. 퇴근하고 정리하고 집에 오면 대략 7시 반이 넘는데, 6시에 일 마치자마자 랩탑을 덮고 밥부터 먹고 집안일을 시작하니까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여유롭게 소화 시키고 운동까지 하고 씻고 잘 수가 있었다. 게다가 어제는 무려 질질끌고 아껴 하던 게임 오션혼의 최종 보스도 잡고 엔딩을 봤다.

 

그런데 화요일인 오늘은 벌써 한주를 위해 충전해 둔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처럼 빌빌대었다. 월요일에 너무 많은 일을 해버린 탓일까. 5일에 나눠 써야 할 한 주를 버틸 티라이트 촛불같은 째끄만 열정을 다 태워버린 것 같았다. 게다가 집 밖에 나갈 일이 구지 없는 날이었으므로 과일이나 간식거리가 떨어졌는데도 사러 나가기가 너무 귀찮아서 결국 나가지 않았다.

 

문득 화요일의 나는 원래 이렇게 의욕이 없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지난 주부터 작은 노트에 6칸을 그려놓고 한 주의 할 일목록을 간단히 쓰고 지워나가는 투두리스트 같은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데, 지난 3주간의 화요일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화요일을 무조건 이렇게 별 것 안하고 보낸다기 보다는 월요일에 뭔가 많이 한 지지난 주에는 화요일이 텅 비어있고, 지난주에는 오히려 월요일에 쓴 목록을 다 다음날로 미뤄버려서 화요일에 한 일 목록이 빼곡하게 차 있다. 주로 하루쯤 미뤄도 되는 '쓰레기 내다 버리기', '청소기 돌리기', '빨래 걷고 개서 넣기', '장보기' 같은 집안일 태스크들이 적혀 있다.

 

투두리스트 형식의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하니 좋은 점은 써 놓으면 할 일을 덜 미루게 되는 것 같다. 어차피 하루에 많아야 6가지 할 일 목록을 쓸 공간이 있다. 덕분에 어느정도 우선순위 계획도 세워 적어 넣는다. 그러니까 일을 미루고 미뤄서 다른날로 넘길 경우 하루에 6가지 이상 태스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페이지가 지저분해진다. 금방 하면 될 일을 미뤄서 맘 불편하고 페이지 지저분하게 만드느니 대충이라도 해버리자는 마음이 든다. 뭔가 디자인일을 직업으로 가진 인간의 특성을 너징해서 쓰는 좋은 방법 같다. 투두리스트는 그동안 업무용으로만 썼는데 집안일도 어차피 업무같은거니까.

 

내일은 너무 늘어지는 마음을 좀 잡아보고자 회사에 가려고 한다. 단정하게 외출복을 차려입고 운전하는동안 긴장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면 엄청나게 피곤해도 또 그 것을 통해 얻는 활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집 밖에 기어나가야만 장을 보게 될 것 같다. 없으면 없는대로 머리를 써서 뭔가 해먹을 수 있는 능력이 점점 좋아지다 보니 균형잡힌 영양소 섭취가 걱정되거든. 비타민 공급원을 사와야 한다. 으으. 내일은 태풍 영향이 거의 끝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