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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2 0 2 0 멋있는 숫자다

2020년 신년 카드, 왼쪽부터 노르망디, 나, 요를레이, 면조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가족의 신년카드. 올해도 만들어서 인스타랑 페이스북 정도에 올리고 마쳤다. 숫자가 특히 상징성 있고 멋진 해라서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레이아웃을 짤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 게으름 부려 미루고 미루다가 새해 첫날 당일에 또 급조하게 되었다. 아이디어 스케치 한 것보다는 훨씬 덜 멋지게 결과물이 나왔고, 그래픽 디자인 이렇게 밖에 못하나 한숨이 나왔지만 그냥 대충 마무리 하기로 했다. 이걸 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잖아, 그냥 가족사진일 뿐인데.

 

예전에는 신년 카드를 만들면 여기저기 카톡으로도 돌리면서 인사했는데 올해는 그 것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새해가 되면 카카오톡으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여기에 살다보니 점점 이 곳 방식에 물들면서 한국 방식이 어땠더라? 바로바로 기억나지가 않는다. 매 년 반복되는 일종의 의식적인 행동은 전 인류의 '올 해는 뭐 하지' 질문을 해결해주는 편리한 방식으로 각자 발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에서 메시징 앱으로 인사를 건내는 전통은 아무래도 상상하기가 한국보다는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너무너무 느리고, 혹시나 서버에 문제가 생겨도 다 휴가가서 고칠 사람이 없겠지. 한국도 한동안 카카오톡이 먹통이었단 소식을 본 것 같다. 한국도 이젠 사람들이 연말엔 좀 쉬면서 일도 하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올 해는 과로, 자살 등으로 많이 일찍 명을 달리하는 소식을 덜 들었으면 좋겠다. 친구들의 과로 소식도 들을 때마다 너무 걱정이 된다. 변화가 눈에 더 보였으면 좋겠다. 멋진 숫자로 해가 바뀌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숫자의 마법이 이 사람들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매년 일기에 쓰는 것 같지만 나는 딱히 숫자가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바뀌는 시점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올 해 부터는 뭘 해야지 하는 레졸루션도 만들지 않는다. 그 의미는 이해하고, 가치도 공감하지만, 끈질길만큼 하지 않는다. 게을러서만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전세계 모두가 따르는 타이밍을 쫓아가기엔 나는 너무나 뱁새인 탓인 듯 하다. 가랑이 안 찢어지게 내 속도로 가고 싶다. 재작년부터 시작해서 그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효과를 보고 있는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두달 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30분씩 책을 읽는 루틴도 만들었다. 둘 다 루틴이라기엔 주 3-4회 정도밖에 못 지키기지만 이 만큼만 해도 한 주가 바쁘게 지나간다. 여기에 뭔가를 추가하려고 하기보다는 이 것들을 잘 지키고 음미하면서 당분간 세월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려고 한다. 올 해 하고 싶은 것은 원래 이직이었는데, 그래도 날 믿고 받아준 동료들에게 의리도 지키고, 내 아이디어로 시작한 프로젝트도 끝을 보려면 1년은 더 버텨봐야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고민이 된다. 게다가 천천히 고민을 해 볼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해서 좀 느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건강관리를 잘 하고, 스스로 계속 뭔가를 배워가는 사람으로 더 나를 단단하게 키우고 싶다.

 

연말 연시에 재택근무를 2주째 하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대부분 휴가를 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프리랜서가 된 기분이고, 집에 틀어박혀 있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할 일도 있어서 심심하지 조차 않다니 최고다. 돈도 벌고. 2주간 지켜보니 고양이들은 루틴의 천재들이다. 비교적 정확한 시간에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바람을 쐬고 싶어 하고, 낮잠을 15번 정도 잔다. 바뀌는 것은 낮잠과 밤잠 자는 장소 정도인데 이건 그 때 그 때 자기 마음대로 또는 가장 쾌적한 온도의 장소를 찾아 가는 것 같다. 노르망디는 밤에는 주로 나랑 자는데, 그래서 내가 잠자리에 드는 시각에 약간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까지 안오면 본인이 알아서 내 베개로 올라가서 자고 있다. 나도 지난 몇 달간 아침 루틴 만들기 등을 연습해봤는데 장점이 많이 있었다. 일단 가장 좋은 점은 매번 태스크를 새로 생각해야 하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고, 반복 작업이 매일 조금씩 능숙해지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해서 나중에 더 많은 일을 끼워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아침에 약간 게으름을 피웠다. 이제 (거실로) 출근해야지. 오늘만 또 열심히 일하면 주말이다. 독일에서 처음 보내는 연말 연시 정말 느슨하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