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휴가를 써놨었다. 올 해의 마지막 남은 휴가였다. 원래는 느긋하게 그동안 못 한 집안일도 하고, 쇼핑도 좀 하고, 예매해 둔 마르타 아르헤리치 콘서트도 가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난주에 걸려둔 감기 덕에 다 망했다. 일단 감기를 앓느라 체력을 많이 소진해서 거의 자면서 보낸 것 같다. 그리고 화요일에는 본의 아니게 치과 예약을 잡게 되어서 꼭두새벽부터 치과에서 2시간 고통받고 집에 와서 다시 기절했다. 어떻게 보면 휴가 쓴 날 진료를 받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올 한 해 다른 휴가들은 대부분 여행을 가거나 한국에 다녀오는데 썼기에 이번 휴가가 특히 더 기대되었다. 몇 시에 일어나서 뭐하고 뭐하고 뭐 해야지 등 꿈에 부푼 계획을 노트에 적어 두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도 못 지켰고, 역설적으로 정말 좋은 휴가였다.
월요일은 책 좀 읽고, 뜨개질 좀 하고, 과거의 건실했던 내가 겁도 없이 잡아둔 온라인 영어 과외 수업도 받았다. 휴가 중에 예습도 별로 안 하고 한 수업이라 그냥 그랬다. 다음부턴 나에게 이런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서 밥해먹고 우왕자왕 하다 보니 콘서트에 갈 시간이 다 되어서 나갈 준비 정성스럽게 하고서 집을 나섰다. 한 시간 정도 여유 있게 도착해서 로젠가르텐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근처 쇼핑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막상 살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에 칫솔을 사러 들른 데엠에서 까까가 쓰던 비싼 칫솔을 사봤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콘서트장으로 향했다. 명성에 걸맞게 콘서트장은 사람으로 가득했고 나는 가장 끝 자리에서 관람했다. 생각보다 맨 뒷자리가 나쁘지 않았다. 무대는 거의 안보였지만 벽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고, 앉은키를 한 껏 쭉 늘려 앉아서 편했다.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만하임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슈만 피협은 굉장히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소리였고 정말 아름다웠다. 듣다 보니 어느새 슈만 피협이 최애가 될 만큼 멋있었다. 이후에 필하모니가 연주한 브람스 교향곡 3번은 예상보다 좀 아쉬웠다. 만하임 필은 뭔가 보송보송 부들부들한 음악을 잘하는 것 같다. 그런 것 치고 예전에 차이콥스키 6번도 꽤 재밌었는데. 흠. 아무튼 브람스 3번은 유명한 3악장조차 임팩트가 별로 없었다.
화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치과에 가서 무서움에 떨며 기다리다가 독일식 입안 대청소를 받고, 충치 때운 것 두 개를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독일에서 병원을 오롯이 나 혼자 다니기 시작한 건 이 치과가 처음인데 그럭저럭 나의 개떡 같은 독일어를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고서 외국인이라고 봐주지 않고 온갖 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치료를 잘 받았다. 하지만 장장 두 시간 동안 치석제거 및 각종 청소를 하고, 마취를 하고서 필링을 제거-교체하는 작업을 받았더니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아침 10시가 좀 넘어 집에 왔는데 일하고 퇴근했을 때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들어서 일단 잤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2시가 다 되어가길래 2시로 예약해둔 영어 수업을 샤이쎄갈!! 취소해버리고 다시 잤다. 3시가 다되어서야 깼고, 장장 4시간의 낮잠을 자버린 것을 알고 엄청나게 허무해졌다. 조금 있으면 일몰 시간이다. 해가 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마지막 휴일을 즐기고 싶었다. 일단 부랴부랴 원래 하려고 했던 "브런치" 먹기를 시행하러 나갔다. 그렇게 오후 3시 반에 카페에서 아침메뉴를 시켜서 케이크 타임을 갖는 독일 할머니들 사이에 껴서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주변에서 조금 의아해하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고 좋았다. 아침을 다 먹고 나니 길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해가 지고 있었다. ㅠㅠ! 그래서 할 수 없이 새로울 것 없는 크리스마스 마켓 구경은 포기하고 쇼핑몰로 들어갔다. 연말에 만날 사람들에게 하나씩 작게 건네줄 선물을 사려고 여기저기 둘러봤다. 올 해는 향초로 통일하자고 마음을 정했고, 작은 사이즈 유리병에 담긴 향초들을 향을 하나씩 맡아가며 신중하게 골랐다. 다 너무 좋아서 내가 쓰고 싶다.
결국 뭔가 한 것 없이 흐지부지 내 소중한 휴일들은 지나갔고 오늘은 출근을 했다. 간만에 왔다고 동료들이 반겨주었다. 참으로 마음이 힘들고 고되었던 한 해인데, 그래도 이 동료들 덕분에 출근거부증 환자가 되지 않고, 마치 우울증 방지약을 먹듯이 사무실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깔깔대다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문한 초콜렛도 도착했으니 동료들이랑 나눌 선물을 어떻게 포장할지도 좀 고민해 봐야지. 흑흑. 휴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