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 맞는 세 번째 겨울이고, 연말이다. 첫 해에 독일인 친구 커플이 아드벤트 캘린더를 선물해서 처음 이 것의 존재를 알았다. 1부터 24까지 숫자가 적힌 박스가 있고 하나씩 뜯어서 조심히 문을 열듯이 열면 그 안에 매 번 다른 디자인의 초콜렛이 들어 있었다. 24일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열 수 있는 25일의 초콜렛은 엄청 컸다. 12월은 1일부터 25일까지 하루하루 한 해가 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시간의 덧없음을 한 톨의 초콜렛으로 보상받는 아드벤트 캘린더가 있어서 삶에 재미를 0.5g 정도 추가하는 것 같다. 나는 초콜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늘 까서 노르망디에게 축구하고 놀라고 던져줬었다. 그리고 노르망디가 다 놀고 나서 잊어버리고 가면 남편이 주워서 까먹었다. ㅋㅋㅋ 작년에는 동료 수잔이 챙겨줬는데 올 해도 또 수잔에게 아드밴트 캘린더를 받았다. 내년에는 잊지 않고 내가 챙겨줘야지! 싶지만 내년까지 내가 이 회사에 다니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작은 선물이지만 예기치 못했던 것을 때에 맞게 챙겨 받으니 너무 기뻤다.
오늘은 첫번째 아드벤트 캘린더를 오픈하는 날이다. 12월 1일. 벌써 12월이 되었다. 이제는 시간의 흐름이 기대보다는 좀 무서워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매 번 집에 전화해서 엄마 안부를 물어볼 때마다, 나이를 먹듯 자연스럽게 성장하지 않는 내 커리어 패스를 볼 때마다, 부쩍 잠이 많아진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노력해도 술 하루 진탕 마시면 숙취가 하루로 안 끝날 때마다... 시간의 흐름이 마냥 즐겁지가 않다 이젠. 시간의 흐름이 나에게 주는 것보다 빼앗아 가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빼앗길 것이, 가진 것이 많아지기도 했다.
어제는 11월을 동백꽃 필 무렵 마지막회 2편을 몰아 보고서 한바탕 오열 후 거대한 감동을 받고 마무리했다. 유독 드라마를 보면 엄청나게 울게 되는데, 아무래도 꽤 긴 시간 동안 캐릭터들과 쌓아온 정 때문도 있을 테고, 아무래도 안방극장(?)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공감과 감동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인 것 같다. 굳이 신파를 위한 구성이나 연출은 아니더라도 (대놓고 신파이면 짜게 식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겠지) 내게 있었을 법한, 있을 법한, 내 주변의 이야기 같은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감동받는 것은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식의 이른바, 감정 훈련이 아닐까. 막상 같은 일이 나에게 닥친다면 울고만 있을 수 없을 것임을 알기에. 이렇게 틈틈이 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방식을 통해 격한 감정을 배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극은 다행히도 그리고 당연히도 배려심 깊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시청자들 개개인의 삶이 하나같이 독특하게 지랄 맞고 힘듦을 깊게 공감하는 듯한 제작진의 배려가 느껴졌다. 힘드시죠. 한동안 재미있게 본 드라마라도 행복하게 끝내 드릴게요. 앞으로도 힘내며 살아가세요.라는 메시지가 대놓고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보면서 주인공이 힘든 일을 겪어나갈 때마다 소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하나의 성취를 통해 주인공이 성장할 때마다 나도 같이 맥주 한 잔 하면서 매콤한 뭔가를 먹고 싶었다. 이런 나 자신을 관찰하면서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다지도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이 되게 편리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라는 작은 장치 하나에도 그에 담긴 엄청나게 많은 메타포를 이미 내가 살아온 역사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손쉽게 감정을 컨트롤할 스위치가 되는 것. 얼마나 편리해. 내가 살아온 꽤나 긴 세월이 한 문화권에서 주로 뿌리를 내리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장점인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엔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꽤 된다는 걸 이젠 가시적으로 경험하고 있고, 배우고 있다. 아니 뭐 1.5세인 내 사촌동생들만 봐도 공허함을 토로하니까.
12월이 시작되었다. 곧 끝나버리겠지. 시작은 따뜻하게 했다. 이불 속에서 한참을 뭉개다가 나왔다. 이불 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파쉬가 있었고, 머리맡에는 노르망디가 고르릉 소리를 내며 궁둥이로 내 머리를 밀고 자고 있었다. 언제라도 행복의 순간을 떠올려야 한다면 겨울 아침 이불속과 내 머리맡의 노르망디 체온을 떠올릴 수 있을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