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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가을 독일 시골 마을의 주말

내가 사는 도시는 도시라고 칭하기에 조금 애매한, 인구 8만명 정도의 소박한 시골마을이다. 독일에서 가장 소득이 적은 주에 위치해 있고, 프랑스 국경에서 멀지 않으며 주 산업은 농업이고, 큰 화학 회사가 있다. 위치로 따지면 독일의 서남부에 속하고, 독일 하면 보통 떠올리는 베를린, 함부르크, 쾰른, 뮌헨 같은 유명한 도시와는 멀~리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선지 한국에서 살 때 독일에 대해 들었던 한정된 정보를 바탕으로 갖고 있던 스테레오타입과는 거리가 먼 느낌의 동네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소규모 도시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나름대로 배우는 것도 많고,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독일에 와서 살게 된 지 꼭 2년을 채운다. 이렇게 돌이켜 보면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예상했던 대로 난 아직 석사과정 졸업을 못했다. 사실 동기들 중에 벌써 졸업 한 사람은 30%도 안되기 때문에 그다지 죄책감이나 자괴감은 들지 않는다. 이 근거없는 여유는 한국에서 살았다면 절대로 누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들에 비해 나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이니까 이제 졸업을 하고, 일자리도 찾고, 다음 스텝을 밟아 나가야 한다. 겨울동안 열심히 논문을 써서 무사히 졸업을 확정지을 즈음이면 올 해도 다 가고, 2019년이 되어 있겠지.


주중에는 일하러 다녀오고, 과제를 처리하고, 언어 공부를 하는 등 꽤 바쁘게 보낸다. 그리고 주말은 특별한 계획이 없는 한 집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밀린 빨래를 하고, 발코니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은 이런 생활을 전형적인 독일인의 생활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살다보니 독일인이 아닌 나도 그렇게 살게 되었다. 일단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장을 봐야만 하는 이유는 일요일에 대부분의 가게가 닫고, 미리 사둔 것이 없으면 레스토랑을 가거나 케밥, 중국 음식 같은걸 사 먹어야 해서 돈도 깨지고 속도 안좋다. 

그러다보니 토요일에 늦잠자고 일어나 오전에 장을 보는 것이 우리 부부의 패턴이 되었는데, 우리는 토요일 오전에 농부들이 여는 주말장에서 장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장터에서 파는 채소, 과일, 치즈, 고기 등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보다 단연 신선하고, 품질이 좋고, 가격은 비싸다(!!). 하지만 상인과 직접 이야기하고 물건을 살 수 있고, 원하는 양만 딱 살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김치용 배추나 잔뜩 끓여두고 오래 먹을 소스 같은 것을 만들 때는 이 곳에서 산 채소를 이용하면 좋다. 양계장 주인이 직접 파는 달걀은 비싸지만 정말 신선해서 팬에 깨 넣는 순간 노른자 흰자가 각기 생생하게 살아서 탱글탱글 굴러다닌다. 빵도 새벽에 구운 것을 살 수 있고 가격은 일반 베이커리보다 싸면 쌌지 비싸지는 않은 것 같다. 고기는 비교적 많이 비싸기도 하고 요즈음엔 채식 위주로 먹으려 해서 아주 가끔만 사는데 빛깔이나 질감이 정말 예쁘다. 아스파라거스 철에는 아스파라거스 전용 천막이 생기고, 오늘은 꽃을 파는 천막도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조건 들러야 하는 커피 로스터리 천막에서 볶은지 며칠 안 된 신선한 원두를 500그람에 10~12유로(대략 13000~16000원, 진짜 싼 것임) 주고 산다. 이 마을에서 접근 가능한 로스터리 원두 중에서 이 곳 것이 가장 입맛에 맞아서 원두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두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랑 달리 식료품을 사는 대신, 장터에서 바로 내려주는 커피와, 빵트럭에서 크로와상을 사서 장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먹고 왔다. 날씨가 쌀쌀해서 니트를 두개 입고 나갔더니 딱 맞게 포근하고 좋았다. 피부로는 싸늘해진 바람을, 입으로는 따뜻함과 고소한 맛을 느끼고, 코로는 향기로운 커피냄새를 맡으면서 사람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었더니 문득 가을에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장터를 이렇게 즐길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발견을 한 기쁨이 있었다. 남편과 서로 이 동네와 장터를 좋아하는 포인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오후에는 집 청소를 빡세게 하고, 남편은 자전거를 고치고 난 운동을 했다. 그리고 남편 머리를 깍아 주고 둘 다 차례로 샤워를 마친 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바람이 선선하고 햇빛이 좋은 날이어서 자전거 고치기도 운동도 발코니에서 다 했다. 향 좋은 세제로 빤 빨래가 한켠에 널려 향을 뿜어대고 있어서 기분이 계속 좋았다. 사실은 지금도 발코니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하는데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 보너스 여유시간을 번 것 같은 기분이다. 발코니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구름이 지나가고 때때로 경비행기가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보면 시간이 훅 가고 피로도 풀린다. 넓은 발코니가 있는 집에 살아서 너무 좋다. 앗 지금 고양이가 걸어나왔다. 귀여워라!


남편은 우리가 만약 베를린 같은 곳에서 독일 생활을 시작했다면 지금처럼 독일을 좋아 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베를린은 날씨도 많이 다르고, 사람들 성격도 좀 다른 것 같고, 무엇보다 요즘 가장 핫한 유럽도시이니 만큼 집값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고 한다. 으, 이런 발코니가 없는 삶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다. 정말 모든 삶의 형태에는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지만 시골 소도시의 이 여유로움은 만약 떠나야 하는 날이 온다면 정말 정말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