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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30대 기혼 여성 직장인인 내가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

며칠 전 블루스카이에서 이 칼럼기사를 접했다. 한 어린이의 사례인데도 너무나 많은 문제가 엉겨 드러나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본 적 없는 나는 자연스럽게 보호자나 그 가족의 입장이 아니라 아이의 입장에서 공감하면서 읽었다. 나도 그런 아이였고, 이 아이가 하는 말이 뭔지 너무 잘 안다. 비록 나는 외동도 아니고 저출생 시대의 어린이도 아니었지만, 이 환경적 차이점을 제외하면 내가 겪었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사회의 끔찍함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현재의 어린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공감]저출생 시대, 자해하는 양가 외동아이들

한 여학생이 부모, 할머니, 외삼촌 등 무려 4명의 보호자들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다. 그 여학생의 가장 큰 문제는 자해라고 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여학생 세계는 자해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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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을 벗어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이 칼럼을 읽으면서 되새길 수 있었다. 나는 아무도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스스로를 위한 결정을 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혐오했었다. 본인이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원치 않는 희생을 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곰곰히 생각해보지도 않으며, 결과적으로 모두가 어느 정도의 억울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정서는 억울함이다. 개개인마다 사안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억울함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더 억울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해 봐서 억울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고, 차별받는 기분 때문에 억울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주체적으로 가진다면 억울함을 느낄 일은 적을 텐데,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고, 남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고 느꼈다. 아빠는 아빠만의, 엄마는 엄마만의 희생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 관계성안에서 자란 나와 남동생은 딱히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던 엄마 아빠의 희생을 통한 보육과 교육을 받았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말하면 50%는 감히 그런 생각을 했음에 혼부터 났고, 나머지 50% 중에서 어떤 것은 허락을 받거나 어떤 것은 허락을 못 받았다. 하지만 하기 싫은 것이라도 엄마 아빠가 시켜야 한다고 믿는 것을 내가 검토하고 거절할 자유는 없었다. 미성년 시기가 지나도 그 관계성은 어느 정도 유지가 되었다. 결혼을 하니 내가 바라지 않는 관계성이 또 추가되었다. 내가 결정한 적 없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수직관계가 수백 년간 이어진 문화의 결과라며 멋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수직관계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나는 나 나름대로 윗사람들의 기대와 요구사항 때문에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다고, 그래서는 사는 의미가 없다고 느꼈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서 타인이다. 한 개인이 또다른 개인에게 돈이나 시간, 정성 등을 쏟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오롯이 쏟기로 결정한 주체가 정한 것이다. 내가 내 고양이들에게 하루 30분씩 마사지를 해주고 털을 빗기는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나의 행복을 위함이지 내 고양이가 내 보살핌에 감명을 받아서 나에게 애교 같은 보상을 베풀어주길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다른 인간과도 이런 관계를 맺고 싶고, 그것이 좋다고 믿는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령 자신이 써도 되는 100만 원을 아껴서 수학학원을 보냈다고 하면, 그것은 본인이 수학을 잘하는 자녀를 갖고 싶은 욕구 때문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녀가 그것을 너무나 원해서 둘 사이의 계약으로 성립된 것이 아닌 이상, 이 자녀가 수학학원을 다녀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선에서 만족을 느껴야지, 자녀가 수학을 잘하게 되든지 못하게 되든지는 신경 꺼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수학을 그다지 잘하게 되지 못했더라도 그 책임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수학을 잘하게 되기 위해서 100만 원짜리 학원을 다니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자녀의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시키면서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 그 선택지를 도출한 것 또한 자신이지 않나. 나는 이런 어른의 책임감이 '내가 너를 위해 100만 원이나 투자했는데'라고 시작하는 억울함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 환경에서, 24번의 중간고사와 24번의 기말고사, 세지도 않은 수의 다른 학력 평가, 모의고사 등을 보면서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아 높은 등수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12년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미숙하다고 여겨지는 시기였기에 내 생각대로 중요한 선택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보호자나 담임 선생님이 판단하는 대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선택 중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괜찮다. 나도 억울함이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 내 삶을 살아보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러려면 일단 이 모든 관계성과 거리를 둬야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디든 비행기시간 10시간은 걸리는 먼 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안하고 익숙한 환경, 언어, 친구들이 있는 곳보다 내가 나 스스로 오롯이 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더 시급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도합 10년의 외국인으로서의 생활을 그럭저럭 해오고 있나 보다.

 

내가 어린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녀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자녀를 갖게 되면 내가 불만을 가졌던 방식과 다르게 키우면 되지 않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주로 남편에게. 그런데 사실 나는 나 혼자라면, 그런데 어쩌다 아이가 생겼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과의 사이의 아이일 경우는 다르다. 웃기게도 아이가 태어난다면 남편은 자동적으로 '부모'타이틀을 나와 공유하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아직 고수 중인 장점을 모르겠는 가부장제도의 문화 속에서, 아이의 성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라 여겨질 것이며, 나와 자식의 관계는 1:1의 인간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 관계가 된다. 내가 뭘 중요하게 여기냐에 관계없이 양육책임자로서 아이의 성장 스케줄에 맞춰 내 스케줄을 조절해야 한다. 철학적인 부모역할에 대한 남편의 생각과 나의 생각에 매번 합치점을 찾아야 하고, 나아가 확장된 가족, 조부모나 친척들과의 관계에서는 한국인의 얼이 살아있는 위로는 효도하고 아래로는 희생해야 하는 가정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런 세팅에서 내가 생각하는 개인 대 개인으로서 자녀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기는 것은 매 번 그 이유를 증명하고 남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만들 것이다. 자신이 없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데, 만약에 자녀가 내가 생각하는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원한다면 과연 그걸 납득할 수 있나? 둘 중의 한 명은 의견을 굽혀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굽히기로 결정한다면,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든 상황에 대해 억울함을 안 느낄 수 있나?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장년, 노년의 삶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되려나? 자식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가 바라지도 않는 모습의 노년을 보내게 되지는 않을까? 등을 자문해 본다. 결과적으로 나는 전통적인 혈연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끈끈한 애정보다는(이게 좋을 때도 물론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선택을 주체적으로 내릴 수 있는 외로운 자유가 좀 더 절실하고, 그 자유가 있을 때 비로소 내게 주어진 삶을 억울하지 않게 끝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도 억울하기 싫어서 이 결정을 내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