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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봄날은 간다, 드라이브 마이 카

해질녘 동네 프림천을 따라 산책

어제와 오늘 '드라이브 마이카'란 영화를 반씩 나눠서 다 봤다. 좋아하게 된 감독이 찍은 영화이고, 늘 좋아했던 하루키의 소설이 원작이어서 많이 궁금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더 재미있게 봤다. 소설을 읽을 때보다 주인공에게 더 몰입하게 된 건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주인공 가후쿠를 연기해서일까. 남자 창작자를 마음 놓고 좋아하기 힘든 시절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다. 영화 속에 큰 줄기가 되는 소재인 체호프의 극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단순한 사람이 깊게 몰입해서 끄집어낸 감정을 표현해낸 것들이 대게 내게 큰 감동을 준다. 그런 집중력이 나에겐 없어서 좀 동경하게 된다.

 

요즘 내내 이직을 위해 힘쓰다보니 나를 좀 심하게 '직업인'으로서만 대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오늘 저녁은 이력서도 커버레터도 포트폴리오도 그만 들여다보고 좀 쉬려고 한다. 요즘에는 무려, 내가, 아침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서 출근 전에 내가 걸어온 길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만들고 있다. 생각보다 한 게 많아서 추려내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든다. 첫 학부를 졸업 후 총 13년을 일했더라. 정말 긴 세월이다. 영양가 있는 커리어의 기간은 그보다는 짧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도 나는 꾸준히 돈을 벌어왔다. 헤아려보니 15년 정도를 스스로 완전히 경제적인 책임을 다하며 살아왔네. 정말 장하다 나야 고생이 많다. 그래서인지 불안은 적다. 어디든 어떻게든 갈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실패에 좀 덜 vulerable 한 성격이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게 엄살 부릴 만큼 취약한 성격도 아니다.

 

월요일엔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느라 진이 빠졌고, 화요일엔 기분이 안좋아서 내내 집에서만 있었기에 오늘은 산책이 간절했다. 퇴근 후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분명 오후엔 해가 비쳤었는데 나가려니 비가 한차례 쏟아지더라. 그래서 영화를 다 봤다. 식욕도 없어서 오늘은 저녁을 굶어버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미 저녁 9시 37분이네. 그냥 이대로 자면 되겠구나. 썸머타임 덕분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밖이 환해서 산책을 잠깐 하고 왔다. 좋아하는 풀숲 길이 있는데 비가 온 터라 발이 젖을까 봐 다른 길로 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마침 봄날은 간다여서 그냥 그 길을 걷기로 했다. 봄날이 가고 있는데 발이 좀 젖는 게 대수랴. 우리 동네엔 숲과 풀과 공원과 천과 와인 밭과... 온통 자연이어서 혼자서 음악을 들으면서 산책을 하면 그 음악이 진짜 맛있게 들린다. 매일매일 기분에 따라 선곡을 바꾸는데 이렇게 귀 기울여 음악을 들어본 적이 되게 오랜만이라서 요즘 행복하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오롯이 이렇게 쉬기로 마음먹었다. 밥을 안 먹으니 뭐 먹을지 걱정 안 해도 되고 뒷정리를 안 해도 되어서 정말 쉬는 것 같다. 위도 쉬고. 잠들기 전엔 좀 괴롭겠지.

 

지금 어두워진 발코니에 앉아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눅눅하게 차가워진 공기를 밤중에 이렇게 쐬고 있는 것이 되게 오랜만이다. 야외 활동의 계절이구나. 모기도 좀 들러붙는거 같다. 노릉이가 되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 안에서 창문을 통해 날 자꾸 관찰하러 온다. 얘는 내가 안 하던 짓을 하면 그렇게 걱정이 되나 보다. 그럼 걱정 그만 끼치고 들어가서 오늘은 좀 일찍 잠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