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면 최근에 나온 영화를 볼 수 있다. 독일에서, 내가 사는 시골에서는 영어가 원어인 영화조차 더빙판만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서 최신작을 안 본지는 꽤 오래되었다. 가끔 흥행성이 있는 영화는 오리지널 버전을 상영하기도 하지만 나는 영어로 영화를 보는 것은 아직도 어렵다. 특히 내가 잘 모르는 시대를 다룬다거나 전문분야의 용어를 마구 쓰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래서 그동안 마블 영화나 뮤지컬 영화 또는 기생충... 정도만 독일 극장에서 봤다. 대신 일 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할 때 비행기 안에서 많은 영화를 본다. 국적기를 탈 경우 한글 자막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더빙만 한국어가 있고 자막은 중국어만 제공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좋은 것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아.
드디어 테넷을 봤다. 아니 사실은 보다가 말고 내릴 때가 되어서 끝의 15% 정도를 못 봐서 되게 찝찝하다. 엔트로피를 역전시켜 좀 더 빨리 재생을 하는 과거를 가지고 싶다. 테넷 외에도 세 편의 영화를 봤다. 비행시간이 총 11시간 정도 되니까 중간에 밥 먹고 잠깐 졸고 한 순간 빼고는 되게 부지런히 본 셈이다. 고장 난 론, 샹치, 싱잉 인 더 레인을 봤다. 클래식 영화도 비행기 안에서 보는 묘미가 있다. 영화관이나 비행기 안에서처럼 극단적으로 인터넷 접속을 차단해야만 중간에 딴짓을 안 하는 중독자라서 더 그렇다.
어제 도착했고 오늘부터 업무를 시작했는데 너무나 피곤하다. 출발한 때부터 약 4일간 통잠을 잔 적이 없다. 시차 때문도 있을테고, 비행기 같은 불편한 공간에서 잠을 못 자서 괴롭다. 그렇다고 억지로 자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한다고 되지도 않으니까. 지금은 새벽 두 시 반인데 30분 전에 퇴근을 했고, 퇴근 후 바로 씻고 자는 것이 억울해서 일기라도 쓰자는 생각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시차를 넘어서 일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단한 일이다. 남들이 퇴근할 무렵에 일을 시작해서 아주 늦은 시각까지 일을 해야 한다. 몸은 이미 밤이라 피로함을 느끼는데 커피를 부어가며 정신을 챙겨서 회의도 들어가야 하고 지루한 담론을 들으며 그 안에서 오가는 혹시 모를 중요한 내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또 막상 바쁘게 돌아가는 일도 없는 시기여서 더 지루하다.
매번 한국에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오기가 싫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쾌적하게 꾸며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루틴을 완전히 포기하고, 우리 고양이들도 없는 한국에 와서 내가 지내야 하는 공간들이 싫었다. 격리를 위해 미리 예약해둔 숙소는 생각보다는 답답하지 않고 시설도 괜찮은 원룸이라 다행이지만 격리가 끝나면 아빠랑 남동생이 창고로 쓰는 아주 작은 골방에서 침대도 없이 자야 하는 게 너무 싫다. 이제는 돈을 지불하지 않는 이상 한국에 내가 편히 있도록 준비된 공간은 없어서 더더욱 '돌아왔다'는 느낌이 없다. 오늘의 내게는 독일의 집이 나의 집이고 그곳이 돌아갈 곳이다. 독일을 떠날 때의, 그 이후로도 1-2년간 지속되었던 한국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공항에서부터 환대받는 기분이 드는 고국의 서비스, 인프라, 어디서든 들리는 모국어는 너무 좋다. 뭐가 잘 안되거나 궁금한 것이 있을 때 단어를 찾지 않고도, 문장을 미리 머릿속에 준비해두지 않고도 바로 전화 문의를 할 수 있다. 그곳과 이곳의 다른 문화적 행태도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전환이 된다. 게다가 과연 신토불이인지라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고, 배출도 잘 된다. (?!) 아무튼 싫고 좋은 감정 속에 다시 방문을 했고, 이렇게 매년 여러 가지 이유로 방문해야 할 때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시차는 아무래도 쪼는만큼 더 힘들게 다가오므로 그냥 적응이 안 되면 안 되는대로 휴가 전까지만 고생한다고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