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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미니멀리즘체험, 마인드풀니스, 리추얼, …

보고싶은 우리 노릉이

집을 떠나서, 작은 방 한 칸에서 최소한의 물건을 가지고 열흘간 밖에 나가지 않고서 살아내는 체험은 사실 꽤나 귀중하다. 당연히 불편하고 많은 제약이 있지만,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던 것들을 관찰할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지내는 곳은 한국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고, 온갖 인프라와 디지털 서비스가 잘 갖춰져 있다. 덕분에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은 없고 오히려 독일 우리 집에 살고 있을 때보다 그때 그때 욕구에 따라 골라서 주문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넓다. 지금 지내는 공간의 크기는 독일에서 지내던 곳과 숫자로 비교하기도 민망할 만큼 작다. 내가 혼자서 작업실로 쓰고 있는 방 정도의 크기에 싱크대, 냉장고, 세탁기, 작은 욕실이 다 들어있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 내가 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꼭 필요한 만큼'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작은 미니멀리즘 체험과도 같은 것이다. 지금 있는 이 작은 방에서도 끼니를 챙겨 먹고, 8+시간 업무를 하고, 간단한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잠을 잘 수 있다. 주방이 작아도 식재료 처리에 대한 걱정만 없으면 어지간한 요리와 평소에 즐기던 베이킹도 가능할 것 같다. 에어비엔비 숙소로 운영되는 이곳에는 물건도 딱 필요한 것만 구비되어 있다. 머그컵은 한 개뿐이어서 차를 마시고 나서 커피를 마실 때 설거지를 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여기엔 맥주잔이 따로 있다. 정확히 맥주를 위해 만들어진 잔은 아니지만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고 330미리정도 따를 수 있다. 술을 마실 때 반드시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내게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다. 내게는 그런 식으로 지켜야 하는 의식이 몇 가지 있다. 나도 물론 가벼운 여행을 추구하지만, 여행을 하거나 이곳에 올 때도 그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은 굳이 챙겨 다닌다. 하지만 술잔까지 챙겨 다니지는 않기 때문에 숙소에 큼직한 유리잔이 구비되어 있으면 정말 기쁘다. 내가 나름대로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은 별 것 아니지만, 다음과 같다.

  • 잠에서 깨면 가글하기: 리스테린을 챙겨 다닌다. 없으면 소금물이나 맹물로라도 한다.
  • 업무용 옷 입고 일하기: 재택근무 중에 때로는 업무에 몰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시도했고,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 자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치실과 칫솔질을 정성 들여하고, 최소한의 조명만 켜기: 잠 자기 전 의식적으로 윈드 다운하는 것을 도와주고 야식이나 자극적인 콘텐츠 보기 같은 유혹을 덜 받는다.
  • 술은 술잔에, 차/커피는 찻잔에: 어차피 이 것들은 건강이나 몸의 베네핏을 위해 즐기는 것은 아니므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있다면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는 편이다.
  • 술이나 차를 마시기 전에 맹물도 한 잔 마시기: 이거 안하면 나 물 안 마신다.
  • 머리가 잘 안 돌아갈 때는 스트레칭: 의식적인 휴식을 위해서. 그냥 쉬어야지 생각하면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만 더 받는 적도 많아서 일단 끊고 일어나서 몸을 움직인 다음 마음을 다잡는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더라도 15분을 할애해서 스트레칭을 하는 편이 더 나을 때가 많다.
  • 우울할 때 듣는 곡이 있다: 기분이 밑도 끝도 없이 꺼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자동으로 이 곡을 튼다. 오스카 피터슨이 연주하는 you look good to me (we get requests live 앨범의 버전)인데 마음이 진정되지만 슬프지 않은 연주다.
  • 하루에 두 번 창문 활짝 열고 환기하기, 환기하면서 주변 정리하기: 추워도 한다. 바깥세상의 온도나 소리를 느끼는 유일한 시간 같다.

얼마 전에 타계하신 틱낫한 스님의 명상책을 한 권 사서 읽고 있다. 마인드풀니스 개념이 되게 논리적으로 명확한 비유와 함께 쓰여있어서 왜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는지 공감했다. 책을 읽으면서 알아차렸는데, 위에 열거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의식(ritual)적인 행동들이 그 전이나 후에 따르는 행위를 좀 더 의식적으로(consciously)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을 자거나 뭔갈 먹거나 회사일을 하는 것은 사람으로 살면서 되게 중요한 일들이니까 의식적으로 준비해서 잘하고 싶어서 그 방법을 스스로 찾았나 보다.

시차를 넘어 일하다 보니 낮에는 거의 잠을 자기 때문에 블라인드를 내려놓고, 밤에는 오히려 형광등을 환하게 켜 두고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관계없이 자연스럽지 않은 리듬으로 살고 있고, 일할 때 외에는 남는 시간에 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 내 의식들에 의지하게 된다. 아, 또 하나 깨달은 점은 내가 독일의 내 집에서 청소에 정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고양이들이 매일 내뿜는 어마어마한 털 청소가 추가되기도 하고, 공간이 더 크고 물건도 훨씬 더 많으니 청소할 것이 정말 많다. 미니멀리즘, 무소유를 실천하면 시간의 자유를 좀 더 확보하겠구나. 아무튼 이 일기도 시간이 많아서 쓴다.

 

한국에 어느새 비건 음식 옵션이 다양하고 접근이 쉬워졌다. 템페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제 간단한 요가를 하고 밥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