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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살기

발코니 화분의 어린 바질 가지치기 후 나온 작은 잎들로 바질페스토를 만들었다.

바질 페스토(페스토 제노베제)를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하고서 나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전까진 페스토는 시판 고추장이나 간장을 사 먹는 것처럼 슈퍼마켓에서 사서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생바질 잎을 사더라도 보통은 샐러드나 피자 위에 뿌려 먹고 끝났었다. 사실 페스토를 만들기 위해서 생바질을 따로 산 적은 없다. 큰 발코니를 그냥 두기 아까워서 하나 둘 화분을 만들어 두고 만만한 허브 씨앗을 사다가 조금씩 심어봤고, 그중 가장 수확량이 많은 바질을 어떻게 다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레시피는 되게 간단한데 이걸 직접 만들 엄두를 내 볼 환경이 만들어지기까진 오랜 세월과 많은 변화가 필요했다. 작은 화분에서 바질을 키울 수만 있다면 괜찮은 품질의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잣 한 줌, 레몬, 소금만 있으면 되니 시간도 비용도 별로 안 들이고 맛은 더 풍부한 페스토를 만들 수 있다. 난 치즈나 다른 것을 섞지 않고 이렇게 만들어서 파스타나 빵, 채소에 곁들인다.

 

원두를 갈아서 내려 먹는 핸드드립 커피, 다관(찻주전자)에 잎차를 우려 거름망을 통해 숙우에 따라서 다시 찻잔에 따라 마시는 녹차도 비슷한 맥락에서 뭔가를 약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생활 습관 중 하나다. 사실 바쁠 때는 믹스커피나 티백, 캡슐 등 더 효율적인 선택지가 아쉬울 때도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기호식품을 즐기는데에 있어서 다른건 몰라도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까워서 맛을 희생하는 짓을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쭉 커피는 마시기 직전에 원두를 갈고, 차는 가급적 좋은 찻잎을 사서 권장하는 온도에 우려내 마시고 있다.

 

이런 실생활에서 즐기는 것들의 품질을 약간씩 올리다보면 결과적으로는 이전에 쉽게 즐기던 것에 잘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특히 그것이 내 노력과 시간만 조금 더 들이면 되는 경우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직접 담가먹는 김치가 아니면 내 입맛에 딱 맞는 간이 아니어서 김치를 못 먹은 지 한참 되었고, 차 타고 15분 정도 가면 있는 평원 닭 농장의 한편에서 파는 신선한 달걀이 아니면 비린내가 거슬려서 먹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달걀을 먹는 날이 드물어졌다. 근처에서 도저히 구할 방법이 없어서 직접 구워 먹게 된 식빵이라든지 여러 가지 직접 하게 된 것들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이 내 소중한 여가시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단점이라고는 했지만 일상적인 것들을 더 귀하게 즐기게 되면서 몰랐던 기쁨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틈틈이 어떤 것을 얼만큼 더 귀찮게 만들어볼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나오는 원두 찌꺼기를 잘 말려서 설거지용 비누를 한 번 만들어서 써볼까? 잘 입지 않지만 버리긴 망설여지는 옷을 직접 한 번 리폼해 볼까? 면 뽑는 기구를 사서 파스타나 메밀면을 생면으로 만들어 먹어볼까? 이런 아이디어를 실현할 엄두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여름이라 특히 이런 집안일들이 늘어난 덕분에 미디어 감상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미디어 감상만 실컷 하고 지내던 겨울의 좋은점도 있고, 길어진 해와 함께 몸이 바빠진 이 계절의 좋은 점도 있다. 아무튼 생활에 조금씩 정성을 더 기울이는 감각은 좋은 것이다. 시간이 흘러 돌이켜 봤을 때 후회되는 시간낭비는 절대 아니리라 생각한다. 내일 버섯을 잔뜩 볶아서 깍둑 썬 토마토와 삶은 푸실리를 바질 페스토에 비벼 먹을 상상에 기분이 들뜨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