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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정말로 기다리던 함박눈이 내린 일요일

벌써 녹고 있는 내 발코니에 만든 스노우캣

나는 벌써 완전한 어른이지만 출퇴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에 눈 오는 날이 너무나 좋다. 그런데 그 눈 오는 날이 주말이니 두배로 좋았다. 게다가 내가 사는 지역은 원체 눈 구경을 하기 어려운 곳이어서 네 배로 좋았다. 이번 겨울에 한 번 정도 1센티정도 눈이 쌓일 만큼 온 날이 있었는데, 정말 순식간에 녹아버렸어서 그 날은 치지 않기로 했다. 눈으로 내리다가 비로 바뀌어서 질척해지는 것들도 다 제외한다. 따라서 오늘, 2021년 1월 17일, 우리 동네에도 첫눈이 내렸다.

 

최근에는 주말에 최대한 늘어지게 늦잠을 잔다. 별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어차피 생계형 이유가 아닌이상 집 밖을 나갈 수도 없고, 외부 활동과 연계된 무언가를 계획할 때도 아니다. 뭔가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할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변화 없는 창밖 풍경을 매일 바라보는 것도 짜증이 난다. 한국이나 다른 곳에 펑펑 눈이 와서 쌓이고, 사람들이 만든 멋들어진 눈사람 사진을 온라인에서 구경하면서 감옥 같은 곳에 갇혀있는 자의 심정을 조금 이해했다.

 

하지만 오늘은 드디어 우리동네에도 눈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롤라덴을 걷고, 지붕이 없는 부위의 발코니 바닥에 쌓인 두툼한 눈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눈이야! 눈이 왔어!! 드디어!!! 눈이다아아앙라아아아아앍

 

스노우캣 뒷모습

수면잠옷에 실내화 차림 그대로 밖에 나가서 먼저 눈을 밟는 뽀득한 느낌 느껴보고, 고양이들을 애타게 불러보고, 눈을 막 뭉쳤다. 아무 계획 없이 뭉치다 보니 눈사람은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평소에 많이 보는 내 집안의 아름다운 것을 본뜬 형상을 만들어봤다. 그런데 손이 너무나 시리고, 슬슬 젖고 있는 슬리퍼 때문에 발도 너무 시리고 콧물이 줄줄 흐를 만큼 추워서 저 정도로 만들고 마무리했다. 오늘 하루 종일 발코니 나가는 길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스노우캣을 보면서 기분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을 보고 흥분한 면조와 같이 동네 산책을 나갔다. 오래간만에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닥터마틴까지 묶어 신고 우비로 무장하고 나갔다. 너무 흥분해서 포스트 코비드 이후 처음으로 마스크를 까먹고 안 가지고 나와서 다시 집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했다. 길게 한 시간 반 정도 동네 골목골목 하얗게 변한 풍경을 감상하며 돌아다녔다. 최근에 부동산 앱에서 우리 둘이 살면 좋을만한 집 매물들을 구경하다 보니 동네를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되어서 재밌었다.

 

성곽 산책길이 눈으로 덮였다
우리동네의 자랑 천년 넘은 성당과 그 뒷편 광장에서 아이들이 썰매타고,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고 놀고 있었다.
누가 귀여운 자동차 위에다가 귀여운 눈사람을 만들어서 올려놨다.

산책 다녀오니 배도 고프고 몸이 차가워서 라면 끓여서 가늘게 썬 파를 눈처럼 소복이 덮어 넣고 후룩후룩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이번 주말도 결국 또 게으르게 보내버렸다. 그래도 눈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원래 다른 주제로 쓰고 싶은 일기가 있었는데 눈이 온 날의 기쁨에 대해서 쓰지 않고 지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