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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13일의 금요일

창밖 구경하는 노르망디. 깜깜한데 뭐가 보이긴 하나?

13일의 금요일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좋아한다. 그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져도 다 날짜와 요일의 조합 탓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어차피 무서운 일은 매일매일 일어나지만 그 탓이 나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냥 우연의 탓으로 돌아간다는 점이 아주 관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13일의 금요일은 관대한 날이다. 나도 관대하게 하루를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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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컨디션이 엉망이다. 기분도 따라서 영 편안하지가 않다. 뭐가 먼저 잘못된 것인지 둘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내 심신에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제는 하루 종일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일도 회의도 뭐 하나 제대로 못 한 것 같다. 점점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서 뭐 하나 제대로 못하고 넘어갔을 때 불만과 불안이 커진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해관계자 중 한 명이 말해줬으면 좋겠다. 피부도 급 안 좋아졌다. 역시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먹는 것도 대충 늘 먹는 방식으로 먹고 있고, 잠도 잘 자고 운동도 한다. 화장품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아토피가 올라오고 있다. 침구를 하나씩 빨고 있다. 오늘은 치과 다녀오는 길에(이런 구실이 없으면 일부러 나가지 않는다.) 유분감 많은 크림도 하나 사 와보려고 한다. 얼굴이 하루 종일 당기고 표정을 바꿀 때마다 아플 것 같아서 긴장하는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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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고 다들 긴 휴가를 앞두고 있어서 일도 별로 없다. 나는 이번에 팀에서 거의 유일하게 휴가를 쓰지 않았는데(쓸 휴가도 안 남아 있다.) 이렇게 할 일이 없는데 휴가를 안 쓰는 의미가 있나 싶고 뭔가 대놓고 월급루팡을 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병가를 낼 수는 없으니까. (휴가가 다 떨어져서 병가 쓰고 노는 사람도 있긴 있음) 아무튼 벌써부터 할 일이 많지가 않고, 이럴 때는 붕 뜬 기분으로 일 하는 보람도 재미도 없어서 좀 싫다. 내년에는 그냥 나도 연말에 휴가를 써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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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책의 큰 챕터 하나를(5. Human error? No. Bad design.) 오늘 끝냈다. 정말 감동적이고 배울 점이 많은 챕터였다. 몇 번이고 살면서 다시 펼쳐보게 될 것 같다. 돈 노만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개정판 또 나오면 또 살게요. 그 다음 장은 디자인 띵킹에 대한 챕터인데, 처음부터 너무 웃겨서 몇 번이나 폭소하면서 읽었다. 디자이너가 문제의 근본과 핵심을 파고들어 그걸 해결하고 싶어 하는 그런 업무 패턴을 매니저나 엔지니어가 얼마나 마뜩지 않아하는지 묘사를 해 놨다. ㅋㅋㅋㅋㅋ 하지만 이게 디자이너의 네이처이고 이렇게 사고하고 일을 해나가도록 훈련을 받은 것이 너무나 사실이라서 웃겼다. 그간 벌어졌던 수많은 나와 매니저, 클라이언트, 개발자들 간의 실랑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게 내가 특별히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난 내 일을 잘하고 있을 뿐이었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