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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아무 것도 안하는 오전, 비건베이킹

화, 수, 목 일을 하니까 금요일 오전이 되면 보통 주5일 일하는 사람들의 토요일 오전처럼 절대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된다. 오늘도 남편은 출근하니까 알람에 일찍 깨기는 했는데, 누워서 폰 만지작 대다가 다시 자다가 깨다가 하며 결국 10시 반이 넘어서야 침대에서 나왔다. 오전부터 논문을 쓰기에는 멍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감기에 걸린 덕분에 나도 좀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오늘 오전은 아침밥 해먹고 그냥 쉬기로 했다. 아침밥 해먹는 것이 쉬는 거란 생각을 안하는 자취인 또는 살림인이 있겠지만, 요리를 좋아하는데 제대로 못 한지 너무 오래되었고,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는 나로선 되게 사치스러운 행동이다. 문제는 장도 안본지 오래되어서 집에 먹을 것이 별로 없다. 결국 있는 재료로만 비건(계란과 우유가 없어도 되니까) 오트밀 팬케이크를 만들었다. 다행히 유통기한이 상대적으로 긴 두유나 오트밀유는 항상 구비하고 있고, 작은 사이즈의 바나나가 하나 남아있었다. 


비건 베이킹을 되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래도 빵이나 케이크의 고소한 맛을 끌어내는데에 계란과 우유의 단백질, 지방, 버터의 풍미가 큰 영향을 끼치는건 맞으니까. 그런데 독일에 와서 오븐을 처음 가져본 나는 베이킹도 여기서 처음 해 봤는데, 자취인이라 늘 계란과 우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비건 레시피를 많이 따라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주 좋아하게 되어서 어지간해서는 베이킹은 비건레시피만 찾는다. 가장 큰 장점은 굽기 전에 반죽의 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날계란을 못 먹는 나는 일반 케이크 반죽은 좀 맛보기가 꺼려진다. 사실 빵에서 부풀리는 역할은 베이킹 파우더가 하고, 밀가루는 똑같이 쓰이고, 우유는 마찬가지로 고소한 두유로 대체하고, 두유의 단백질이 계란을 대신하기도 한다. 지방은 식물성 기름으로 대체하는데 결과물만 놓고 맛과 형태를 보면 뭐가 비건이고 뭐가 우유, 계란이 들어간 빵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재료들이 잘 섞이고 높은 온도에서 온갖 화학작용으로 부풀어 의도한 맛과 텍스처를 내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맛에 예민한 사람도 빵에서 '계란맛'이나 '우유맛' 같은건 사실 구분 할 수 없다. 케이크에서 지배적인 맛을 좌우하는 재료는 밀가루와 기름의 콜라보, 그리고 첨가된 단 맛이나 향을 내는(카카오 등) 재료, 촉촉폭신 또는 꾸덕한 텍스쳐이기 때문에 사실 내가 말 안하면 먹는 사람들은 다 평범한 생크림이나 계란을 쓴 레시피인줄 안다. 빵도 마찬가지로, 밀가루가 기름과 만나 구워진 고소한 맛과 향, 원하는 텍스처가 잘 구현되있기만 하면 보통 쨈같은 다른 재료와 곁들여 먹기 때문에 구지 버터의 풍미를 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다. 정 필요하면 식물성 기름대신에 식물성 유지로 만든 버터를 써도 되고.


딱히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플렉서테리언의 삶을 사는 듯 하다. 주중에는 거의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다. 당연히 동물성 제품 소비를 줄이는데 일조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실 그 것보다 이기적인 이유가 훨씬 많다. 일단 동물성 단백질 소화를 잘 못시키는 위장, 생고기나 날생선을 만지기 싫어하는 게으름, 또 장을 자주 보지 않기 때문에 신선도에 민감한 제품은 주말에 장 본 날, 하루 이틀 밖에 먹지 못한다. 회사에서는 항상 베지테리언 메뉴를 먹는데, 회사식당 동물성 재료의 품질이나 조리 방식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기를 자주 먹지 않고, 신선도와 품질에 민감한 위장 덕에 지역에서 생산되고 품질관리가 철저히 된 제품 위주로 사먹어도 가계에 큰 부담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독일 빵에는 버터를 발라먹고, 계란은 좋아해서 늘 주 초반에 사다둔걸 다 먹어버린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나 아시아를 여행 할 때는 이렇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먹고 배탈이 날 지언정 존맛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맛은 어차피 없으니까 그냥 건강하게 먹고 싶은거다.


나의 오전이 벌써 4분밖에 안 남았다. 일기쓰며 머리를 부팅하긴 했는데 커피도 한잔 더 마시고 싶고 스트레칭도 하고 싶다. 오늘은 한두시간만 더 게으름 피우다가 논문 쓰기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