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을 잃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독일에 온지 1년 9개월이나 되었다.
그 중 일년 정도는 내가 잘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영어를 다시 배워나가는 기간이었다. 독일어 수업을 아예 안들은건 아니지만 그냥 기분 전환 수준이었지. 외국에 나가서 초반에 한참 호기심이 가득하고, 궁금한게 넘치고, 알아야만 하겠고, 막 이런 기분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나로써는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이해하고 싶은게 언어를 배우고 싶은 가장 큰 모티베이션이라 그 시기가 정말 중요한데 말이지.
그 사이에 독일어만 꾸준히 한우물처럼 깊게 파내려간 남편은 이제 직장에서도 사투리를 배워 쓸 만큼 독일어를 잘 하게 되었다. 비교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얼마나 하면 저정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롤모델이 바로 옆에 있다는건 실보다는 득이 많은 것이겠지.
내 경우는 이제 소위 말하는 돈을 쓰기 위한 독일어는 하고 사는데, 돈을 돌려받기 위한 독일어는 좀 어렵고, 돈을 벌기위한 독일어는 아예 불가능하다. 친구들은 내가 말은 아직 수줍에서 못해도 자기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 눈치밥 30년의 내공 덕분이지 독일어권 거주 경력 1년 9개월은 엄청 큰 도움은 아닌 것 같긴 하다.
어학원을 다니지 않은것은 아니다. 방학 때 1-2달씩 두번, 그리고 주2회 듣는 저녁반 코스 두번. 그래서 꾸역꾸역 B1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문법은 제법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표현을 많이 몰라서 막상 내가 하는 말은 문법적으로는 그럭저럭 틀리지 않을진 몰라도 도무지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많은 듯 하다. 처음에는 (물론 여전히) 발음이나 억양이 너무 흉내내기 어려워서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면 주눅들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발음 때문은 아닌 케이스를 많이 경험해서 그건 일단 신경을 덜 쓰려고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정규 교육과정을 다 마친 나에게 늘 '외국어=영어' 였다. 12년의 정규교육과정 중 최소 8-9년은 쭉 영어수업이 있었고, 따로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대학생 때는 회화 학원도 한두달 다녔던 것 같고, 어학연수처럼 집중적으로 언어만 배운건 아니지만 캐나다에 가서 살 때 초반에 어학원을 3개월 다녔다. 그러니까 뭐 투자한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투자한 시간, 영어를 쭉 마음 한켠의 짐처럼 여기고 살아온 기간이 길어서 이젠 구지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이 술술 말하고 살기는 한다.
독일어도 같을까? 물론 제1외국어와 제2외국어는 이해의 폭과 표현 습득 속도가 다르긴 하겠지만, 게다가 영어와 친척뻘의 언어인 독일어는 조금 더 빠르리라 기대는 하지만, 이런 답답한 심정은 영어를 배우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초심을 잃음과 함께 목표도 잃어버린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더 잘하게 되길 바랄뿐, 전처럼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예를들어 독일인 할머니와 도란도란 수다떨며 궁금했던 생활비법 같은걸 묻는 나의 모습 같은거. 오히려 그런 그림을 그리던 시절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말이지.
지금 배우고 있는 저녁반 수업의 선생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다. 언어학 전공해서 대략 7개국어를 conversation level로 구사하시고, 독일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30년간 독일에 사셔서 독일인들의 독일어를 지적할 수준이시고, 언어의 발전 과정, 역사같은걸 깊게 공부하셨는지 가끔씩 들려주시는 전문적인 내용이 되게 흥미롭고, 사실적으로 독일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 이런 선생님한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라도 선생님 따라 다음 반도 듣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사실 독일어가 아닌게 또 문제다.
그리고 영어를 이론먼저 배우고 실전은 훨씬 나중에 접한 것처럼 독일어도 그렇게 배우는게 나에게 맞는 방법인건지, 아니면 아직 내가 경험 못한 나에게 더 맞는 최적화된 방법이 또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언어를 잘 배우는 사람은 지금 생각해보면 외국어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고, 그것에 대해 거부감이나 부담감이 덜하며, 이미 여러 외국어를 배워서 구사해본 경험으로 인해 스스로의 레벨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연습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조건을 내가 아직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주눅들면 안된다. 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고, 난 그동안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른 데다 투자했을게 분명하니까. 휴. 힘내자.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