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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0개국어 구사자

외국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 또는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중인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소리 중에 '나는 지금 0개국어를 할 수 있다'가 있다. 아무래도 외국어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구사할 수 있는 어휘량이 한정되어 있고, 제한된 어휘로만 생각을 하고 의사소통을 하다보면 이미 잘 하는 외국어는 물론, 모국어로 조차 생각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어휘나 의학, 법 등의 전문적인 어휘는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조차 어려운데, 어려운 어휘를 쓰는 대신 의사소통에 우선순위를 두고 쉽게 쉽게 풀어서 설명하며 살아가다보면 조금만 복잡한 개념이 담긴 어휘를 사용해서 고차원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되게 어렵고, 종종 그냥 포기하게 되어버린다. 또 일상적인 표현중에서도 가장 사용 빈도수가 훅 내려가는 것 중에 관용어나 숙어들이 있는데, 예를들어 손을 빌린다, 꼬리를 잡는다 같이 다른 외국어로 1:1 번역이 안되는 표현들은 거의 쓰지 않게 되면서 서서히 잊어가고 있다.


게다가 영어로 난생 처음 배운 개념들, 예를들어 학교에서 배운 심리학 관련된 지식들은 한국어로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쓰이는 어휘들을 먼저 한국어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어디까지가 영어를 외래어로 그대로 쓰고, 어디까지가 한자어로 해석한 단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한자어로 번역한 단어가 입에 잘 붙지도, 개념이 한방에 이해되지도 않는다. 예를들어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Norm of reciprocity를 이용한 설득기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Norm of reciprocity를 그대로 풀어 설명하면 '자신에게 혜택을 베푼 사람에게 보답하려 하는 심리'정도로 말할 수 있겠는데 이걸 용어로 규정해 둔 것은 '상호성 규범'이다. 상호성 규범이란 말만 듣고는 아무래도 이게 Norm of reciprocity를 말하는 거라고 바로 떠올리기 어렵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외국에서 발전되고 정리된 학문을 한국에서 번역어로 배울 때 매일매일 느꼈던 것이긴 하다. 그래서 차라리 영어로 공부하는게 더 쉽겠다!! 라고 당돌하게 생각해 버렸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 보다.


게다가 요즈음엔 지난 2월에 결심한대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모국어, 제 1외국어 이후 제 2외국어를 배울 때 많은 사람들이 겪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외국어랑 무지하게 헛갈린다. 내 경우는 영어와는 이제 헛갈리지 않는데, 예전에 잠깐잠깐씩 배웠던 다른 외국어랑 헛갈린다. 스페인어나 가끔은 심지어 프랑스어. 프랑스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냥 교과서를 첫장부터 끝장까지(끝장까지 끝냈는지도 사실 가물가물하다) 넘겨봤을 뿐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헛갈린다. 아마 어느정도 능숙한 회화 레벨까지 배우지 못한 언어들과 다 헛갈리는 것 같다.


참담한 수준의 독일어 실력으로 매일매일 답답한 와중에 영어도 그다지 잘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래도 내가 둘러쌓여 생활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어가 독일인이 외국어로써 구사하는 영어다보니까 가끔은 이게 영어인지, 시스템이 대충 영어 어휘로만 바꿔둔 독일어를 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다가 영어가 모국어인 동료, 매니저와 회의 할 때면 엄청나게 긴장하고, 또 몇몇 표현은 당췌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각기 다른 언어들과 싸우며 살다보면 내 스스로 지식의 지평을 늘이는 일은 너무 피곤해서 못 하게 된다. 그래도 요즘에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출퇴근 하고 있어서 몇몇 새로운 정보성 지식은 얻고 있지만, 최근에 이슈가 되는 민감한 현안들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고, 내 입장을 생각해보고 하는 류의 소위, 사고는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내 모국어 실력도 줄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왜냐하면 이런 것을 고민하고, 토론하고, 글로 쓰고 해서 생각을 언어로 치환하지 않다보면 머지않아 머릿속에서 다 휘발되어 버리거든.


외국어 실력 향상을 위해 영어나 독일어로 일기를 써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시간과 지적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아직 시작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은 들어.


아무튼 정말 빡센 3월이 벌써 중순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