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일기를 정말로 오랜만에 쓴다. 왜 점점 띄엄띄엄 쓰게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트위터 때문이려나. 그리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요즘엔 쉴 시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안하고 쉬어버린다. 단순한 휴대폰 오락이나 하는 정도. 그리고 그정도 힘들지 않은 때에는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를 보거나 뜨게질을 가열차게 했다.
오늘도 퇴근 후 짜파게티 끓여먹고 설거지를 한 후 쇼파에 앉아서 멍 한 표정으로 뜨게질을 하고 있었다. 배경음악은 오늘 회사에서 누군가 추천한 이루마의 음악을 틀어놨다. 쇼파 등받이 위에는 고양이가 나에게 붙어 앉아서 졸고 있었다.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완벽하게 회복중인 모드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순간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랜만에 이 곳에 들어왔다.
뜨개질은 작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까까가 알려줘서 시작했다. 지금도 여즉 연습생 단계여서 이것 저것 닥치는대로 떠보고 있다. 속도도 그다지 빠르지 않아서 현재 뜨고 있는 도일리는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아직 절반정도 완성했다. 물론 하나만 쭉 뜨면 지겨워서 다른실로 동시에 이것 저것 뜨고 있다. 일이나 공부도 한 우물만 깊게 파는 성질이 아닌지라 이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도 시작한 것들은 대충이라도 다 끝을 보는게 내 장점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는 하나씩 차근히 시작하는 것보다는 많은걸 성취하는 편인 것 같아.
그런고로 워킹 스튜던트라는 포지션으로 일하는 지금이 굉장히 만족스럽다. 학생이라고 해서 공부만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은근 심했는데,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포지션이 되니 아무래도 일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부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의 노력만 기울여서 더 효율적으로 되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학위가 목적이니까.
게다가 워킹 스튜던트는 학기중에는 주 20시간밖에 일을 할 수 없는데, 덕분에 나는 16시간씩 일하고, 주 2회만 출근한다. 원래 하던 일이라 프로세스를 완전히 꿰고 있어서 16시간만으로도 회사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이상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고, 주 2회만 출근하면 회사가는 날이 기다려질만큼 일 자체가 재밌어지는 마법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난 공부보다는 일을 잘 한다. 공부도 일처럼 하긴 하지만.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산력이 점점 증가하고, 이제는 인류에게 필요한 재화가 어느정도 분배된 시대에 구지 주 5일을 꼬박 일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세상이 얼마나 풍요로우면 미니멀리즘이 숭고하게 힙한 듯한 느낌으로 유행을 타는 마당에, 인력 갈아넣는 생산성이란게 되게 의구심들고, 잉여 생산물 만들어내서 썩혀봐야 환경오염만 되지 인류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고로 주 2회만 바짝 즐겁게 일하고 남은 시간 행복하게 살고싶다. 하지만 물론 시급받는 입장에서 이것만 일해가지고는 남은 5일을 행복하게 보내기엔 좀 부족하다. 아무튼 노동은 여가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행위를 위해 돈을 버는 목적일 뿐, 열정이란 명목으로 부려먹힘 당하다보니 디자인 자체에 넌덜머리가 났던 지난날을 상기하며 이런 생활이 가능한 길게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현재 남편이나 주변 어린 친구들이 뿜어내고 있는 열정, 꿈, 비전 같은 것들이 새벽녘 안개처럼 느껴지며 크게 공감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더이상 나는 내가 하는 일로 내 정체성과 존재를 정의당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내 일은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스킬로 동료, 파트너, 고객, 대중을 조금이라도 이롭거나 편하게 해줄 수 있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소득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 정말 좋다. 게다가 일도 재미있는 편이다. 못생긴 것을 더 아름답게, 불편한 것을 더 편하게 바꾸는 일을 하니까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이 나의 소명은 아니고, 내 존재 가치는 더더욱 아니다.
뜨개질을 하다보면 되게 온전히 나로 있는 시간을 경험한다. 쓸모가 있는 것을 직접 만들어내고, 스스로 디자인해서 예쁘기까지 하니 굉장히 보람차기도 하지만, 그 보람만이 뜨개질의 효용은 아닌 것 같다. 어쩐지 명상을 하는 느낌이고, 작은 예술행위를 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같은 생초보라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까까가 한길길뜨기와 짧은뜨기를 알려주면서 일상의 작은 성취감이 생각보다 되게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한 코 한 코 고르게 떠서 한줄을 완성하고, 그 줄들이 모여서 완성된 소품이 되는 그 성취감이 이렇게 쉽게 얻어지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거의 반복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전처럼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루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든지, 지난 하루 동안 있던 일중에 미처 시간이 없어서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던 순간을 되세기며 상상속에서 내 감정을 다시 그 상황에 밀어넣어 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매슬로우는 생존을 위한 생리 - 안전 - 소속 및 사회적 - 존경 - 자아실현의 순서로 욕구의 우선순위를 매겼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오히려 소속 및 사회적 욕구를 생리적 욕구보다 앞선 순위로 둔 설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정말 공감한다. 처음에 매슬로우의 삼각형이론을 배울 때도 나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인정받는 느낌이 없으면 가장 우울해지고, 그러면 정말 아무 욕구도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는 목숨을 걸고 오지로 봉사활동을 하거나 파병같은걸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인정을 받는 '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냐 또한 중요한 문제 같다. 스스로를 잘 모르면 칭찬을 받아도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느낌으로 어색할 뿐 그다지 기쁘지가 않다. 내 자신이지만 사실 가까이서 만나기는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와 혼잣말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뜨개질 같이 혼자서 고요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튼 일하거나 공부해야 하는 날은 바쁘게, 그렇지 않은 날은 뜨게질과 집안일을 천천히 하면서 지내고 있다. 2월까지는 이렇게 쉬고 3월부터는 이제 뒤로 미루고 미뤄뒀던 독일어 공부를 할까 한다. 아마도 나는 돈을 받거나, 돈을 써야만 움직이는 물질주의 게으름뱅이 이므로 돈을 주고 학원을 다니거나 시험을 보거나 해야 할 것 같다.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피곤하니 일단 아무 생각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