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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Hamburg 둘째날, 비가 주룩주룩

일기예보대로 비가 주룩주룩 오는 하루였다.

우산을 챙겨들고 미술관으로 갔다. 

호텔 근처에 가고싶은 미술관이 두 곳이라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비오는 오전에 찬찬히 고전 회화를 감상하면 무척 좋을 것 같아서 쿤스트할레로 향했다.



01. Hamburger Kunsthalle


건물이 정말정말 크고 멋있다. 많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웅장하고 고상하고 세련되었다.

건물 옆 벽으로 보이는 반지하층 창문으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오는 날 개인 사무실에서 미술관 업무를 보는 사람들을 보니 어쩐지 부러웠다.

오전 10시 오픈시간에 맞춰 갔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티켓을 살 준비하고 있었다.

학생할인을 받아 거의 반값에 티켓을 구입하고, 넓고 자리 많은 로커에 짐을 보관 후 입장했다.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미술관은 오픈시간에 맞춰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시장으로 입장하니 단단한 하드우드 바닥에 칠해진 왁스, 페인트, 그리고 오래된 유화의 냄새가 뒤섞여 특유의 미술관 냄새가 확 났다.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시한번 미술관은 오픈하자마자 오는거라고 느꼈다.

하지만 내일은 일정상 오후에 가야한다. 아쉽네.

두시간동안 가장 윗층에서 전시중인 서양화 콜렉션을 전부 다 봤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중간중간 의자에 앉아 감상하긴 했지만 좀 긴 휴식이 필요해서 미술관 카페로 갔다.

점심시간쯤이라 배가고파서 차대신 오늘의 스프를 시켰다.

당근생강스프였는데 달달하니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먹었다.

미술관에서 하는 간단한 식사는 늘 맛있는 것 같다.

쉬다가 나머지 현대미술, 기획전을 다 보고 나오니 어느새 두시가 넘었다.

비가 주룩주룩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02. Schanzen Bakerei


별 특징 없는 독일식 빵,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곳에서 비도 피할 겸 식사를 했다.

도미튀김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03. LUSH 매장


비가 오고, 겉옷과 바지가 슬슬 젖으니까 불안해졌다.

눅눅한 날씨에 돌아다녀서 땀도 좀 베었을테니 옷에서 냄새가 날까봐.

언젠가 LUSH에서 파는 고체향수를 본 적 있는데, 시내에서 러쉬매장을 본 것 같아서 그걸 사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매장에서 시향을 하는데 향이 전부 다 너무 별로인 것이다.

게다가 test용 10종류 향수가 전부 향이 비슷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문질문질한 데다가 열어 둔지 오래되어서 향이 변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도저히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스프레이형으로 시향했을 때 가장 시원한 향이 나는 것 같았던 Dirty로 집어왔다.



04. 휴식


춥고 지쳐서 좀 쉬고, 옷도 챙겨 나갈 겸 호텔로 왔다.

아까 산 러쉬향수를 발라보니 좋은 향이 났다! 역시 테스터가 이상한 것이었어.



05. Mellin Passage


아까 미술관숍에서 함부르크의 Lieblingsorte(가장 사랑받는 지역?)이란 책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백화점 같은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유명하다. 가는 길에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한 마리 참새처럼 Apple 스토어에 잠시 들렀다가 근처에 있는 Mellin Passage를 찾았다. 입구부터 기묘하고도 지적인 기운을 풍기는 좁고 긴 3층짜리 복층 서점이 있었다. 내부가 마법사나 킹스맨이 아지트로 삼을 것 같이 멋졌다. 그릇을 파는 가게, 미술품을 파는 가게 등이 있고, 고급스러운 아랍음식 전문점은 바다가 보이는 외부에 파티오가 펼쳐져 있었다. 팔라펠 하나 먹을까 하다가 가격보고 포기했다.



06. Planten un Blomen


큰 호수를 따라 빙 둘러 숲이 멋지게 조성된 공원.

산책이나 운동하는 사람이 종종 보였지만 붐비지는 않는다.

제대로 차려입고 달리기나 버핏같은거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비 갠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고 있자니 정말 행복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도 참 좋았다. 명품거리가 있는 화려하고 모던한 빌딩들을 지나서 왔다.

물흐르는 소리가 참 좋았다.



07. Bucerius Law School, Helmut Schmidt Auditorium


건물이 멋진 부쎄리우스(?) 법대의 도서관으로 추정되는 건물과 타이포그래퍼 헬무트 슈미트의 오디토리움을 겉에서만 봤다. 근데 이 헬무트 슈미트가 그 헬무트 슈미트와 동일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왜 법대앞에 타이포그래퍼의 오디토리움이 있을까 싶다. 아무튼 둘 다 멋진 건물이었고, 법대 건물도 르네상스에 지어졌을 법한 오래된 성같은 멋진 건물이었다. 작은 정원도 있고, 바로 앞이 Planten un Blomen 공원이라니 여기 학생들은 정말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법을 공부하기는 싫으므로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08. Matsumi


일식집. 긴자와 비슷한 동네에서 긴자 한복판에 있는 백여년된 경양식집 같은 멋드러진 간판을 한 일식집을 발견했다. 이건 누가봐도 일본인의 감각이라고 느껴졌다. 나도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독일에 와서 제대로 된 맛있는 일식을 먹은 적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딱 한번 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 많이 갈증이 나 있는 상태다. 돈부리나 라멘같이 만만한걸 먹어야지 하고 들어갔는데 웬걸, 엄청 고급스러운 일식집이었고, 손님들 대부분이 정장 잘 차려입은 근처 회사원들. 진짜 긴자 한복판의 가게같다. 진짜 일본인(혼혈 2세)가 운영하는 것 같은 집이다. 예약을 안하고 혼자여서 다찌에 앉았다. 메뉴판을 보다보니 아무래도 사시미를 먹어야겠어서 치라시 스시를 시켰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기린도 한잔. 옆에도 혼자 온 아저씨였다. 일본어를 섞어가며 주문하고 혼자 흐뭇해 하셨다. 이것 저것 많이 시켜서 드시더라. 부러웠다. 나도 부자가 되면 가끔 이런데서 혼자 회포 풀고 싶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 부자가 아닌 지금도 혼자 회포 잘 풀고 왔네. 배도 부르고. 하핫. 치라시 스시는 감동적으로 엄청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대한 딱 그 맛에 퀄리티도 좋았다. 예상치 못한 나마비루에 놀란 몸이 적당히 달궈져서 기분 좋게 배를 두들기며 나왔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이었지만 이런게 (돈쓰는) 행복 아닌가 싶다.


내일은 빵만 먹고 다녀야지...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