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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일상에 침입한 뉴타입

이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다. 외국인이라 별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A라고 칭한다.


A는 유학생, 유럽에서 멀지 않은 나라에서 왔다. 20대 초반으로 추측되며 나이는 모른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다.

학기초부터 묘하게 오바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이었다. 은따 당하는 모습이 딱하다고는 생각해서, 몇 번 대화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방에게 지나칠 만큼 이것 저것 요구하는 타입이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만 쉬지않고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타입임을 깨닫고, 더이상 가깝게 지내지 않았었다. 그래도 다른 학우들이 두루 모여서 그녀에 대한 험담을 할 때나 짖궂은 농담을 할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물론 그 다른 학우들은 평소에 정중히 행동할 줄 알고, 유머러스하고, 소위 말해 성격 좋은 아이들 중심이었기에 'A가 내 생각대로 쉬운 애는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A가 어느날 나한테 전화를 했다.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자신이 당장 잘 곳이 없다고 우리집에 재워달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고, 갑자기 잘 곳이 없다는게 대관절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살던 집에서 부당하게 쫓겨나게 되었다거나 하는 문제인가 싶어 걱정도 되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상대에게 이유를 캐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걱정하는 마음이 있으니 괜찮겠지 싶어서 물어봤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의 경험담을 들었었기에 나와 가족이 걱정도 되었다.


A가 처음 설명한 사정은 이랬다. 

나는 지금 새 아파트를 찾고 있는데, 곧 이사할 것이다. 이사 전까지 친구네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친구가 아프다. 그리고 친구가 집을 비우게 되어서 갈 곳이 없어졌다. 제발 일요일, 월요일 이틀만 자게 해달라. 나는 매일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기 때문에 밤 늦게 10시 넘어 가서 잠만 자고 아침에 나가겠다. 제발 거절하지 말아달라. 자기는 이렇게 남한테 부탁하는게 너무나 스트레스 받는다. 제발 거절하지 말아라.

일단 사정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남편에게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하니 또한번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매달린다. 남편이 동의하면 우리집에서 자도 좋다고 대답했다. 이틀밤 쇼파 한켠 내주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약간 이상한 아이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둘 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시 전화에서 오라고 하니 정말 기뻐하면서 고맙다고 연거푸 인사를 했다.


Day 1


A가 오기로 한 일요일, 오전 일찍 A의 전화를 받았다. 뭔가 다른 부탁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친구가 아프고, 친구네 집이 너무 멀다. 나는 지금 시험 때문에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시험을 보는 다음 주에 나를 재워줄 수 있냐?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됐다. 친구가 갑자기 아픈거냐? 무슨소리냐, 너 곧 이사한다는데 설마 다다음주까지 방이 없는거냐? 물어보니 "I think you didn't understand"라고 했다. 그래서 이해 못했다. 정확히 말해달라. 이번주 일, 월에 우리집에서 자는거 맞냐? 아니면 다음주로 연기하는거냐? 라고 물으니 오늘 밤에 가서 설명하겠다고 한다. 약간 불안했지만 알았다고 했다.


저녁에 집 근처에서 만나서 집까지 걸어왔다. 작은 백팩이 빵빵하게 짐을 싸서 왔더라. 만나서 설명한 내용은 이렇다.

지금 친구네 집에서 잠깐 살고 있다. 하지만 친구의 룸메이트가 너무 전형적인 독일인이더라. 나한테 방의 주인인 친구가 여행을 갔는데 너가 여기 있으면 안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날 도와줘서 고맙다. 그렇지만 친구 집은 너무 멀어서 불편하다. 너는 가까운데 살아서 참 좋겠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남편과 인사를 하고, 같은 설명을 되풀이 했다. 집 칭찬을 계속 했다. 나는 참 복이 많다고 부러워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너무나도 계속 내가 lucky함을 강조하니, 칭찬인지 원망인지 잘 구분이 안되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남편에게 다시 엄청 큰 소리로(어려운 것을 부탁할 때 목소리가 커지나 보다) 

다다음주 시험기간에도 자게 해달라, 친구네 집이 너무 멀어서 지난 5월에 있던 시험에 늦어서 택시비를 50유로 넘게 썼다. 택시비로 돈 날리느니 너네한테 돈 주는게 난 것 같다.

남편이 자기는 상관없지만 민희도 시험보기 때문에, 시험 전날 내가 얼마나 예민한지 알기 때문에 어렵겠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내가 시험을 안보는 목요일에 본인은 다른 과목 시험을 봐야 하므로 수요일 밤에 재워달라고 했다. 너무 곤란하던 찰라 집근처 1박 25유로짜리 호텔이 생각났다. 거길 추천했다. 이용해본 친구의 추천사도 같이 전했다. 그랬더니 안전문제 등 핑계를 대며 싫다고 한다. 너처럼 키도 크고 남편도 있는 사람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얼마나 불안한지 이해 못한다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결국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고, 흐지부지하게 여지를 남겨뒀다.


우리는 저녁을 늦게 먹는다. 잠자리에도 좀 늦게 드는 편이다. A는 이미 저녁을 먹고 왔다고 해서 샤워하는 동안 우리는 케밥을 사러 나갔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본인이 지각을 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왜 우리집에서 자야 한다는거지? 조금 일찍 나오면 되는 것 아닌가? 수많은 물음표를 가진 채 집에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우리는 묵묵히 우적우적 씹고, 그녀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주로 독일에 대한 불만, 학교에 대한 불만, 학생들(내 친구들 -_-)에 대한 불만, 자신의 현 생활에 대한 불만이었다. 특히 집을 구하는 데에 애를 먹은 경우들을 설명하면서, 독일 집이 너무 불결해서 본인이 병이 났다는 것이다. 좀 놀라웠다. 그래도 유럽에선 가장 청결을 중요시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는 독일이 더럽다니? 그리고선 우리집은 깨끗해서 좋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2년동안 유학을 했었다고 하던데, 당시에는 빈 중심가에 집이 있었고 그 때 삶은 정말 만족스러웠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서 너희도 한국에 비해 독일 물가가 비싸서 힘들지? 이렇게 물어봤다. 아니라고, 물가는 여기가 훨씬 싸다고 말하니까 이해를 못하더라. 동아시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게 남한도 북한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경제수준일거라 지레 짐작한다. 그 부류겠거니 여겼다.


A가 자겠다고 한 11시경, 우리는 각자의 노트북을 들고 우리 방으로 자리를 피해줬다. 침대에 누워서 컴퓨터를 하자니 불편했다. 단 이틀 뿐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잠들었다.



Day 2


아침 일찍 학원에 가야하는 남편과 A가 같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서관 오픈 시간부터 가서 공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공부를 저렇게 열심히 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후에 옆도시에서 독일어 수업을 들으므로 10시경에 집에 오는데, 그 때 맞춰 오겠다던 A는 9시경에 지금 가도 되냐고 문자가 왔다. 남편이 집에 있으니 가서 벨 누르라고 말했다.


밤 9시 반쯤 집에 거의 다다라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을 안먹고 기다리는 남편에게 볶음밥 테이크아웃 해갈지 묻기 위해서였다. 어두운 목소리의 남편이 전화를 받았고, 잠시 후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A가 내일밤에도 자고 가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제 너무 불편했던 남편은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렵겠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A는 울면서 그럼 자기는 어떻게 해야하냐고 계속 사정했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가서 듣기로 하고, A는 현재 우리집에서 자기 먹을 것을 요리중이니 우리 둘 것만 사오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집에 가서 남편에게 설명을 듣고, 주방에 있는 A를 만났다. 자신이 사용한 주방 기구를 닦고 있었다. 내가 아끼는 스테인레스 냄비를 수세미로 거품을 내서 닦고 있었다. 순간 그 광경을 보고 속이 상했다. 하지만 일단 그게 급한게 아니어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남편이 따로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A는 사실 현재 계약 예정인 집이 없다고 한다. 친구네 집에도 이미 5월부터 살고 있었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건지 대충 짐작이 된다. 그 친구란 사람도 어찌보면 정말 불쌍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된다. 남편은 이해가 안되는 부분, 가령 어째서 집 계약도 하지 않고서 왜 열흘안에 이사를 간다고 말한거냐, 집을 알아보고는 있는거냐, 네 친구는 왜 친구면서 열쇄도 안주고 여행을 간거냐 등등을 따져물었고, 그래서 자신이 A를 울렸다고 했다. A는 남편의 말에 대답하다가 앞뒤가 안맞아지자, 내 말이 거짓말 같냐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 때 남편이 들은 말은 내가 처음에 A와 통화할 때 들은 말과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나에게 부탁할 때 이사할 날짜가 이사나오는 날짜와 맞지 않아서 1주일정도 친구네서 지내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사정으로 이틀만 잘 곳이 필요해 진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결국 하루 더 재워주자고 제안했다. 누구보다도 본인이 화가나고 불편할텐데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니 일단 알았다고 했다. A는 하루 더 자겠다는 이야기는 내게 전혀 안하고, 계속 시험공부가 얼마나 힘든지,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지금 이 도시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등 불만을 토로했다. 계속 듣고 있자니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A, 니 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너는 분명히 일요일, 월요일만 잘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편에게 들으니 화요일에도 자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우리는 원래 오버나잇 게스트를 받을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너가 워낙 급하게 부탁해서 도와주려고 했다. 이게 결코 우리에게 쉽지 않음을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네가 사정이 자꾸 바뀌고, 이러면 곤란하다. 너를 완전히 도와주지 못하는건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더 이상은 부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상대로 A는 다시 울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현 상황을 다시 구구절절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간 자신의 친구가 원래 내일오전에 돌아오기로 했지만 사정상 하루 더 있다가 온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서 자신이 우리에게 큰 폐를 끼치는 거냐고 물었다. 우린 면전에 대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 이 화의 불길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떤 경위로 지펴진 것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화가 났다. 하지만 꾹 참았다. 어차피 남편이 하루 더 자고 가라고 말한 이상 번복할 수는 없었다.


A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를 감아야 한다고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나왔다. 드라이어를 찾지 못해 그랬는지 물이 뚝뚝 떨어질만큼 머리가 젖어 있었다. 드라이어 줄까? 물어봤다. A는 괜찮다고, 자긴 원래 이렇게 잔다고 답했다. 순간 다시 속이 상했다. 나는 젖은 머리로 베게를 그대로 베는 행위는 절대 안하는데, 내가 빌려준 내 베게를 어제 한번 젖은 머리로 사용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괜찮다, 사양하지 말라, 머리 말리고 자는 것이 좋다고 하며 드라이어를 보여주러 갔다. A는 기어코 자기는 필요없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미안, 내 베게가 걱정되어서 그래."라고 하니까 퍼뜩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물론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잘거야! 걱정하지마!"라고 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래 알았다고 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A는 드라이를 하겠다고 했다. 그 순간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강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머리를 말리지 않고 누워서 베게솜이 젖게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고, 호텔이나 어딜 가더라도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소위, 상식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A를 위해 다시 노트북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서, 오늘 낮에 집안을 청소하며 본 A의 흔적들을 떠올렸다. 독일집의 불결함을 토로하던 어제의 말과는 달리 그녀는 딱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침에 변기안에는 그녀가 버린 팬티 라이너가 둥둥 떠있었다. 물에 녹거나 쓸려 내려가지 않는 것을 변기안에 버리다니, 너무 끔찍했다. 결국 내가 위생장갑을 끼고 주워서 별도의 비닐봉지에 버렸다. 게다가 우리집 룰과는 달리 그녀는 볼일 보고 물을 내릴 때 뚜껑을 덮지 않는다. 이건 사실 우리집에 놀러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래서 좀 포기했다. 그 뿐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브러쉬에는 A의 긴 머리카락이 정말 많이 뭉쳐있었다. 나는 빗을 쓰고 나면 항상 바로 머리카락을 제거한다. 매번 10초정도 투자해서 정리하는 편이 다음번 사용할 때 기분좋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치우려고 보니 그녀는 비듬이 많은 모양이었다. 다시 속이 상했다. 오늘은 그 빗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그녀가 설거지해둔 그릇과 폿도 사용전에 다시 닦아야 했다. 자잘한 찌꺼기가 안닦여서 붙어있었다. 내가 유난히 깔끔을 떠는 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 하룻밤만에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묘사했던 '불결한 독일인에 비해 깔끔한 자신'과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고 한국의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며 위로를 받았다. 이 곳의 친구들과도 수다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래도 이 애를 아는 애들에게 험담을 하게 되면, 너무 내 위주로만 이야기하게 되어서 과장된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관두기로 했다.



Day 3


낮에 남편과 함께 청소를 하면서, 오늘만 버티면 된다, 으쌰으쌰 서로를 위로했다. 만일 하루 더 있게 해달라는 등 요청을 할 경우 어떻게 거절할지도 서로 상의했다. A는 그럴 가능성이 정말 다분히 느껴지게 이틀간 행동했었다. 어제 A가 부엌을 쓴 것에 대해서 내가 질문을 했다. 사전에 나와 이야기 한 적 없는데 혹시 남편에게는 양해를 구했는지 알기 위함이었다. 어제 밤에 A가 들어오면서 장을 봐왔다고 했다. 그리고서 부엌좀 써도 되냐고 묻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버터, 소금 등은 우리 냉장고의 것을 그냥 가져다 썼다고 했다. 우리는 점점 쪼잔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살짝 자괴감에 빠졌다. 대인배의 길은 정말 멀고 험하구나, 우린 대인배의 길은 포기하기로 했다.


저녁에 A가 왔다. 들어오자마자 너무 피곤하다고 했다. 남편이 인사치례로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으려면 정말 힘들었겠다."라고 말하니, 그렇다고 이 집에 와서 쉬자니 너희가 불편할테니까 그럴 수 없었다고 생색을 냈다. 이제 더이상 예쁜 말은 힘든 나는 "그래도 도서관에 쇼파도 있고, 거기서 쉬면 된다."라고 알려주는 척 대화를 매듭지었다.


A는 바로 주방과 화장실을 넘나들며 뭔가를 했다. 내가 혹시 요리하는거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어? 왜? 안돼?"라고 몇번이나 되물었다. 나는 괜찮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불안해져서 차를 끓이면서 요리하는 것을 구경했다. A는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이미 우리 냉장고 속 물건들을 전부 파악한 듯 했다.) 독일 음식이 너무 맛이없어서 자신은 정말 고통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서 버터를 쓰겠다고 말했다. 당황한 내가 "으응... 그래"라고 흔쾌히 대답하지 않으니, "내가 버터값 지불할게!"라고 했다. 필요없다고 했다. 약간 자존심은 상했지만 기왕 쪼잔하게 나가는거 내 소중한 스뎅냄비를 지키자고 맘먹었다. 버터를 자른 나이프로 냄비안을 휘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재빨리 실리콘 주걱을 건네주며, 이 냄비는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 쓰고나서 씻는 방법이 따로 있으니 씻을 걱정은 말고 바로 먹으라고 했다. A는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묻더니 알았다고 했다.


저녁을 엄청난 속도로 먹으면서도 A는 줄곧 오늘 하루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등등 이야기했다. 우리는 한국에 보내야 하는 메일과 그를 위한 작업을 위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렌더링 기다리며 독일어 숙제를 했다. 모르는 것은 남편에게 물어가면서. 이런 나를 보고 A는 너는 남편이 독일어 도와줘서 정말 부럽다며, 자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3일간 수십번을 들은 소리, "Can I ask you something?"을 또 시전했다. 내일 아침에 갈 때 자신의 옷가지를 이 곳에 뒀다가 2-3일 후 찾으러 와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거절했다. 이렇게 빠르게 뭔가를 거절할 수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_-; 옷가지가 몇장 되지도 않았고, 왜 이걸 두고가겠다는건지 좀 이해가 안됐다. 그래서 혹시 가져갈 백이 부족하면 종이백을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갖고 있다고 하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나온 "Can I ask you something?", 본인은 11시에 자야한다고 하며, 할 일을 하되, 음악을 꺼달라고 부탁했다. 시각은 10시 30분이 약간 넘어서였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음악을 끄고, 불은 가장 어두운 것으로 바꿔켰다. 우린 2-3시간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A는 떨떠름하게 알았다고 하고 누웠고, 자신은 11시전에 잠들지 못하면 잠들기가 어렵다고 우리한테 (조용히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뭐 조용히 할 수는 있는데, 일할 때 나는 키보드 소리나 연필로 뭔가를 쓰는 소리 등은 어쩔 수 없었다. 소근대면서 작업진행상황 관련 대화도 해야했다. 속으로는 내 집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싶었다. 그래도 한번 잠들면 조금 덜 조심해도 되겠지 싶어서 잠들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다시 상의할 일이 있어서 남편을 불렀다. 그랬더니 A가 또다시 아주 큰 소리로 "Can I ask you something?"을 외쳤다. 자기가 너무 피곤한데 잠을 잘 수가 없다며, 언제 잘 예정이냐고 했다. 그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A에게 대답도 잘 해주고, 웃으면서 대해주던 남편의 얼굴이 싹 굳는 것을 봤다. 나도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욕을 할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참자라고 생각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A, 미안하지만 우린 일을 해야한다. 너가 여기서 자는 이틀동안 밤에 처리해야 할 일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도 피곤하고, 일을 지금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저녁 내내 뚱하니 조용한 나에 비해서 그래도 A의 불평불만에 잘 대답해주던 남편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애초 예상한 작업시간은 3시간 정도였지만, 한번 렌더링이 잘못되는 바람에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계확을 살짝 변경해서 최대한 빨리 끝내고 내일 다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업을 조정했다. 결국 12시경에 끝내고 우린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가 들어가는 소리가 나자 A는 짜증섞인 한숨을 쉬었다.



Day 4


남편은 아침일찍 일어나서 어제의 작업을 마무리하고, 학원갈 준비를 했다. 아침에 둘이서 대화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너무 졸려서 그냥 쭉 잤다. 누군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또 다른 누군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후 남편이 돌아왔다.

A, 갔어. 야호! 작은 화장품을 두고 갔길래 뛰어가서 주고왔어. 다시 찾으러 올까봐 ㄷㄷ

졸린 눈을 비비며, 고생했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아침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A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학원에 가면서 나에게 오전중에 A가 쓴 이불과 베게의 커버를 빨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학원 마치고 오는 길에 쇼파를 소독할 약품을 사오겠다고 했다. 이 것이 청소덕후 우리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소금뿌리기 방식인 것 같아서 웃겼다. 오전중에 A가 잔뜩 남기고 간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 열심히 빨래와 청소를 했다. 빗은 정말 끔찍한 상황이어서 온갖 약품을 뿌려 닦고, 소독하고, 마지막으로 베이킹소다물에 담궈뒀다. 남편이 와서 그 광경을 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5년간의 결혼생활로 맞춰온 청소에 대한 기준과 호흡이 잘맞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학원을 가는 길에 기차역에서 A를 마주쳤다. 난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자, A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러 왔다. 의아했다. 어젯밤에 화를 내고서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길래 분명히 나에게 화가 난 것이라 생각했다. 인사를 뜨뜻 미지근하게 하고, 단답형으로만 대답을 하니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며 곧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간 있던 일을 정리하며 3일간 뜨겁게 타오르던 화가 식는 것이 느껴졌다. 스트레스 해소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오랜만이다. 나는 대게 인간관계 관련한 나쁜일은 금방 잊고, 잇다른 생각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혼자서 끙끙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밤에 남편과 저녁을 사먹으며 이 일에 대한 교훈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는 내 자신의 옹졸함, 편협성, 소심함, 일상에 대한 집착 등을 발견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세상엔 내가 최악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견줄 수도 없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의 불쾌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남편도 어느정도 동감한다고 했다. 자기는 이제 한국인과 이미 친구가 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같은 공간에서 자고 먹고 생활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나도 동감했다. 그야말로 A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청결, 부탁하거나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는 태도 등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A는 떠나면서 남편에게 시험이 끝나면 같이 맥주한잔 하자고 제안했다고 했다. 남편은 당연히 본인의 시험을 핑계로 거절했고, 나보고도 연락에 응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뭐랄까, 둘 다 이정도로 피하고 싶은 사람은 난생 처음 만났다고 토로했다. 이 곳에 묘사한 것으로 우리의 당혹스러움이 얼마나 표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3일이 지나갔음에, 우리 고양이들이 무사함에 감사했다. A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불편을 초래하는지 인지하지 않으며, 본인의 절약과 몸의 편안함을 위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났었다. 다시는 엮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동안 내가 만나고 관계했던 상식적이고, 존중할 줄 알며, 체념과 염치가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세삼 감사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