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여행을 했다.
사는 곳을 떠나서 호텔에서 1박을 하는건 독일와서 처음이다.
처음이라고는 해도, 아직 독일에 온지 3개월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새로운 나라에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여행하는 기분이겠거니 싶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행에 대한 갈증은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늘 가야할 곳을 가고,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르기 때문에,
특별한 계획없이 누구도 그 어떤것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을 떠돌 때 느끼는 홀가분함이 그리웠다.
한국에서 휴가차 독일로 온 은차님과 친구분덕에 렌트카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려 다른 도시에 가봤다.
Baden-baden 이란 온천으로 유명한 독일 서쪽의 도시. 우리나라말로 목욕-목욕 -_-;
프랑스와 가까워서 그런지 건물의 장식이 유난히 클래식하고 우아했다.
독일은 두번의 세계대전을 겪고도 여전히 도시 대부분이 옛스런 건물을 유지하고 있는데,
고풍스러운 맛은 있지만 검소하고 지루한 국민성탓인지 장식은 제한되어 있고, 비율도 어딘가 압도적이다.
그런데 바덴바덴은 지난한 역사동안 주인이 바뀌는 경계에 있어서 그랬는지, 또는 옆동네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프랑스가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은 거리 풍경이었다.
크리스마스여서 도심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의 명절처럼 여기의 크리스마스는 온 가족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마켓에는 가족들이 나와서 간식도 먹고 쇼핑도 하느라 온갖 연령대의 독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무심코 들렀다 가기로 결정했던 곳이라 아무 목적 없이 도심과 마켓을 서성였고, 비교적 포근한 나맀여서 산책이 참 즐거웠다.
그리고 달려서 목적지였던 Stuttgart로. 벤츠의 고장.
사실 여긴 너무나 대도시라 아무도 여행의 목적으로 추천하는 곳은 아닌데,
나는 소도시에 3개월간 살면서 대도시가 너무나 그리워져서 높은 빌딩과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는 것만으로 고향에 온듯한 편안함을 느끼는 듯 했다.
고향이란 말은 모두에게 다른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으면서 결국은 같은 컨셉으로 다같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호텔에 차를 대놓고 저녁을 먹을 곳을 찾으러 모두 문닫은 캄캄한 도시를 해맸다.
어떤 프라이빗한 공간에 대가족이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는 테이블이 보였는데,
홀린듯이 면조가 들어가서 식사가 가능하냐고 물어봤다.
듬직해 보이는 요리사인지 서버인지가 가능하다고 답했고,
우리는 뻘쭘뻘쭘 들어가서 서비스나 가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쫄아 있었다.
예상대로 규모는 아주 작지만 파인다이닝을 제공하는 곳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이게 비싸지는 않은 어쩐지 실속있는 맛집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코스를 먹기에는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서, 각자 스타터와 메인을 하나씩 시켰다.
나는 과일과 가든 샐러드 채소가 든 샐러드 한접시와 소의 볼살을 구워 만든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정말정말 부드럽고 쫄깃하고, 식감과 향이 넘나 좋은 훌륭한 음식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고 잘먹는 우리들에 비해 두분은 평균에 훨씬 못마칠만큼 소식하는 분들이라 어쩐지 재밌었다. 매번 서로를 신기해 하는 식사시간.
또한 간만에 비슷한 연령대의 지인과 한국어로 수다를 떨 수 있어서 더더욱 스트레스가 풀리는 시간이었다.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한정되면 생각의 폭도 함께 한정되는 느낌이라 많이 답답했던 것 같다.
다음날은 조식을 먹고 함께 벤츠 박물관을 갔다. 누구나 다가는 목적지를 찍을 생각은 그 누구도 없었는데, 크리스마스 여휴중에 문을 연 곳이 없어서 결국 가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게 관람했다. 자전거에서 발전한 형태의 아주 초기 모델부터 메르세데스와 합병 후 현재의 아이덴티티가 된 날렵하면서 우아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흘러도 변치않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공간 디자인이 정말 대범하고 멋있어서 누군가 독일에 온다면 추천해야 할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설령 누구나 가는 관광지 도장격파하듯 방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이후 우리는 헤어져서 우린 좀 더 슈투트가르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두분은 다음 목적지인 뮌헨으로 가셨다.
26일 월요일이었어서 크리스마스보다는 아주 쪼금 더 연 가게가 있었다. 그래봤자 맥도날드조차 열지 않은 여전히 고요한 도시이긴 하다. 성, 오페라하우스, 대학교, 미술관 등이 있는 도심을 서성이다가 성 앞 미술관 1층의 서점에서 한참 디자인과 건축 서적을 봤다. 이런 시간이 도시에서 휴식하는 시간인 것 같다. 이런게 그리웠다. 푹신한 의자가 있는 카페에 앉아서 졸다가 일기쓰다가 책보다가 하는 그런 시간들. 그립다. 문 안닫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짜증내던 그 스타벅스에서의 시간들조차 그립다.
전부터 궁금했던 덴마크 사람들의 인생철학 'Hygge'에 대한 책이 아주 예쁜 디자인으로 펭귄사에서 발행한 것이 있어서 한권 샀다.
하지만 여기서만 즐길 수 있는 휴식도 좋다.
물이 꺼진 분수의 물결이 바람에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서 감자칩을 먹는다든지, 벤치에 앉아서 멍때리는 그런 시간도 정말 좋다. 약간 쌀쌀한 날씨는 필수적이다. 간만에 구름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들뜬 사람들 표정을 구경하며 오랜만의 햇살을 함께 즐기는 연대감.
광장 바로 옆에 큰 브로이하우스를 발견했다.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혹시 자리가 있나 싶어 들어가서 물어봤더니 4인석이 하나 비어있는데 합석을 동의하면 거기로 안내해준다고 해서 콜. 샐러드 한접시와 고기요리 한접시씩 시키고, 브로이 하우스니만큼 지역 생산 생맥주를 두잔 시켰다. 헤페 바이젠을 시켰는데 살다살다 이렇게 깔끔하고 청결한 맛의 밀맥주는 또 처음이다. 너무 맛있는데 많이 마실 컨디션은 아녀서 아쉬웠다. 음식도 진짜 맛있었다. 가게 역사나 규모를 보니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것을 먹은 직후의 들뜬 마음으로 역으로 향했다. 이제 ICE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기차역에서도 내내 기분이 좋았다. 추운날씨에 비까지 맞으며 돌아다닌 탓에 면조는 기차에 앉자마자 골아떨어졌고,
나는 아까 산 Hygge를 읽으며 덴마크 사람들과 함께 행복에 젖으며 만하임까지 금새 도착했다.
책한권 들고 기차여행을 좀 더 자주 하고 싶다.
집에오니 두 고양이가 '어디갔다 이제 왔어!!'하듯 야옹야옹 나무라며 따라다닌다.
집에 왔다는 느낌.
샤워하고 촛불을 켜고 팩을 붙이고, 집에왔다는 이 느낌, 아늑한 Hygge타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