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정리하고 있다.
물건을 정리하는 것일 뿐인데 한시즌의 인생을 마감하는 의식을 치르는 느낌이다.
캐나다에 갔다 올 때도 두번 느꼈던 감정인데, 그 때는 아무래도 부모님 집이나 이모집에 얹혀 살던 홀몸이었으니 내 살림이 얼마 되지 않았다. 옷과 책, 씨디, 디브이디, 컴퓨터 같은 전자제품 정도가 다였다.
지금은 다르다.
남편도 있고, 고양이 둘도 있다. 독립적인 살림도 5년째 하고 있다.
머리가 넷이니 아주 기초적으로 챙겨야 할 것들도 꽤 된다.
그렇다 해도 짐은 아주 최소한만 가져가야 하므로, 사람 둘의 짐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먼저 자주 입지는 않지만 예뻐서 아껴놓던 옷들을 처분했다.
쓸만한 것들은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하고, 헌 옷들은 밖에 내놨더니 금새 누군가 가져갔다.
만화책 중에 평생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중고나라에 팔았다.
좋은 타이틀들이어서 금새 팔려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팔아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서 우릴 감동시켰다.
책은 ebook 리더기를 하나 구입해서, 이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처분했다.
책을 읽기에는 ebook 리더기보다 종이책이 아무래도 훨씬 낫지만 급한대로 한국어 책 읽고 싶을 때 유용한 기계다.
아껴서 잘 썼던 이름있는 그릇들은 중고나라에 내다 팔았다.
쓰던거라 좀 싸게 내놓았더니 엄청 많은 문의를 받았다. 문의주시는 분들이 대부분 엄청 친절하고 나긋나긋하셨다.
이제 안들을 거라 생각하는 씨디들도 추려서 처분했다.
팔릴만한 것도 있었지만 들어줄만한 사람에게 주거나 영 아닌 것들은 그냥 내다 버렸다.
하지만 몇백장이 남았다. 이건 잘 포장했다. 독일가서 자리잡으면 오디오도 하나 사고, 차탈 때 들어야 하니까.
컨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많이 간편해 진 지금도 아직 음악은 씨디로 듣게 되는구나.
디브이디들도 마찬가지로 버렸다.
영화야말로 이젠 보는 채널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넷플릭스와 온라인에서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영화파일이 꽤 늘어나서 기쁘다.
컵이나 기타 쓸모있는 그릇이나 잡화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선물로 줬다.
부디 잘 쓰이길.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의외로 좋은 물건의 기준은 가격이나 품질을 떠나서 얼마나 잘 쓰였냐는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지는 않으면서 품질 좋고 예쁘고 비싼 물건이어서 보관만 해둔 것들을 기어코 처분하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또 마음먹은 것이 있다. '추억이 깃든 물건'과 같이,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는 것을 최소한으로만 하기로. 가령 누군가가 무언가를 기념하며 선물한 물건은 정말로 버리기가 힘든데, 선물을 받았으면 최대한 노력해서 잘 쓰고, 버릴 때는 미련없이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좀처럼 잘 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물건들은 잘 쓸만한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하는 편이 더 좋은 것 같다. 쓸려고 만들어졌고, 사용할 것을 상상하며 구입했을텐데 안쓰고 놔두기만 하는 것이 오히려 물건에게도 선물한 사람에게도 미안한 일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짐은 아주 간단하게, 약 일주일치 옷과, 여행용 세면용품, 신발 두켤레, 최소한의 위생용품, 전자기기만 들고 가기로 했다. 요를 노릉의 용품은 조금 더 복잡하다. 사료때문에 설사가 잦은 노릉을 위해 지금 먹고 있는 사료를 최대한 많이 들고 가야 한다. 또 간이 화장실, 모래, 밥그릇과 물그릇, 캣닢 장난감, 간식, 작은 스크래쳐, 털청소용품 ... 꽤 많은 것이 필요하다.
부디 모든 것이 큰 문제없이 잘 진행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