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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내릴 정류장을 놓쳐서...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은 맑고, 잠이 안와서 누워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가 살짝 잠들었는데 아빠가 교회가자고 깨운다. 생각해보면 나때문에 교회를 옮긴 아빤데 내가 맨날 게으름 피우느라 거의 3년간 혼자 다니셔서 그게 다 나 때문이란걸 최근에 깨닫고 한달넘게 열심히 아빠와 동반 출석중이다. 사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좀 많이 멋진데, 특히 성가대가 거의 프로급이다. 구성원들도 죄 다 전공자에 현재 케비에수 교향악단에 있다든지 유학갔다 온 사람도 많다 들었고, 지휘자 보글머리 아저씨도 뭔가 굉장한데에 계신 분이라고 했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들어보면 안다. 이럴 때 보면 난 참 뭐 기억하고 외우고, 떠올리고 하는거 참 귀찮아 하는데 직업도 그렇고 취미도 그렇고 굉장히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적성에 딱 맞는달까. 여튼 햇빛좋은날이라 그런지 목사님 설교시간에 실컷 졸고-_-; 내가 좋아하는 이어령교수에 대한 일화를 말씀하시길래 퍼뜩 깨서 듣다가 또 흘려버리고 멍때리다가 나왔다.
하루종일 멍한 상태를 유지하며 (일요일인데 굳이 정신 똑바로 차릴 이유가 없다!) 오늘 내일 입찰서류 마지막 점검때문에 잠깐 사무실에 나와달라는 대표님 말씀에 집이 아니고 마포로 향했다. 당연히 버스안에서도 바깥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공덕 다음 마포역이라서 공덕역에 멈췄을 때 '아 내려야지..'생각했다가 마포역에서 또다른 생각을 하느라 지나쳐 버렸다!
내릴 정류장을 노친게 한두번도 아니라서(사실 아주 잦다. 버스를 5번타면 1-2번 정도?-_-) 버스가 마포대교 건너 여의도로 향하는걸 공허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시원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낮은 날씨가 아주 덥기 때문에 시원한 강바람이 쐬고 싶었다. 왜 땡볕 생각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다리를 건너 도착한 정류장은 버스 한 정거장이라고 하기엔 아주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멈췄다. 정류장 바로 옆은 공원이라서 일단 들어가 서성이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서 공원화장실을 이용하고 기분좋게 손을 씻는데 세군데서 문자가 왔다. 뭔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전부 무시하고(사실 읽었는데 셋 다 무슨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한강 다리를 오래 건너려면 분명히 목이 마를테니 옆 편의점에서 녹차를 하나 샀다. 350ml짜리 작은 페트병에 든 소켄비차가 1600원이나 해서 오백원짜리 동전 두개밖에 없었기에 카드결제를 했더니 아저씨가 날 아버지의 원수처럼 바라봤다.
공원길 바닥엔 왠지 말라죽은 지렁이가 가득했고 까맣고 딱딱해보이는 반짝이는 벌레들이 바삐 지나갔다. 그로테스크한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애들 부대가 지나가고, 휴일맞이 나들이온 4자매 꼬맹이와 가족이 지나가고, 어느 공원에나 있는 썬캡쓰고 파워워킹하는 부부가 지나갔다. 공원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마포대교에 진입하려는데 자동차들 신호 참 지겹게 안지키더라. 초록불 켜지고 한참 기다려서야 건널 수 있었다. 신호 기다리면서 6키로에 임박하는 노트북가방이 무거워 난간처럼 생긴 곳에 얹혀놓고 있었더니 어떤 똥배나온 나랑 비슷한 또래의 아저씨(외모적으로)가 날 불만스러운 듯이 쳐다봤다. 왜지?
다리를 건너는 내내 머릿속을 텅 비웠다. 조형물을 보면 '아 조형물이구나' 생각했고, 까치를 보면 '아 까치구나' 생각했다. 다리 중간중간 공사중인 곳이 많았는데 '여기저기 공사중이구나' 라고 느꼈다. 반대편에서 줄지어 오는 자전거들을 피해 무사히 다리 끝까지 도달하기까지 20여분의 시간이 걸렸지만 중간중간 목말라서 멈춰 서서 1600원짜리 녹차를 마신 것 말고는 딱히 뭔갈 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리를 다 건너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 별안간 질주하는 크림색 제네시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내 뒤를 스쳐갔지만 나는 그저 '앗 제네시스에 치일 뻔 했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만약 그 제네시스가 날 받았더라도 아마 내가 이겼을만큼 난 아무 생각도 없는 단단한 상태였다.
보도로 들어서니 빼곡한 가로수가 너무 반갑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난 '아 참 더웠다' 라고 느꼈다.
사무실로 올라갔더니 문은 잠겨있고 대표님은 오는 중이라고 하셔서 스타벅스에 앉아서 기행기를 쓰고있다.
맥북프로는 무겁지만 들고다니면 친구같기도 하고 이렇게 뜬 시간에 '기록'을 하게 해주어서 정말 좋다.
맥북프로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