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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내 세상이 너무 번잡하다

4주쯤 전부터 아빠가 와 계신다. 하루종일 울려 퍼지는 아빠의 스마트폰 소리가 시끄럽다. 뚱뚱한 남자들이 멱따는 목소리로 소리 지르며 방송하는 것을 하루종일 틀어두신다.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티브이소리가 너무 싫었다. 왜 계속 켜두는지 모르겠지만 끄면 다시 켜신다. 청력이 떨어지셔서 소리도 크다. 테이블매너도 엉망이고 개인위생도 그렇고 내가 싫어하는 한국 남자 노인의 특징을 많이 갖고 계신다. 그걸 눈앞에서 보며 견디는 것이 힘들다. 여기서는 아무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니까 더 비교가 된다. 구글맵과 도이체반앱 사용법을 나에게 배워서 혼자 다른 도시 여행도 다녀오시고 대단한 면도 있으시다. 날씨도 안 좋고 음식도 입에 안 맞고 무엇보다 심심해하신다. 평생을 집안에서 작은 왕처럼 보살핌 받고 살며, 자기 자존심이 가장 중요한 한남적 성향이 다분하고, 실질적 가장인 엄마가 연결해 주던 세상만 안온하게 취하던 사람임을 관찰해 왔다. 딱히 달라진 모습을 내게 보여준 적도 없다. 따라서 내가 며칠 잔소리한다고 뭘 바꿀 수 있지 않음도 아니까 그냥 견디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있다.

 

노릉이가 아프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을 흘린 지는 오래되었고, 재채기와 콧물을 동반하다가 급기야 콧물에 피가 섞여 나왔다. 동네 수의사를 세 번 만났고, 항생제 주사도 두 번 맞았고, 나빠져서 2차 병원에도 다녀왔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항생제로 치료하는 감염, 두 번째는 오른쪽 코나 눈 근처 피부 안에 생긴 종양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시티를 찍으려면 비용이 백만 원 넘게 드니까 일단 항생제를 처방받아 왔다. 약을 먹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치료가 되면 감염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이 때도 이미 의미가 적은 단계라고 생각은 했지만 800유로는 굉장히 무서운 금액이므로 일단 의사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약 먹은 지 첫날, 이튿날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다. 당장이라도 예약을 잡고 시티를 찍자고 하고 싶었으나 독일은 동물 의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끈다. 차례를 기다려 예약을 잡기 위한 전화를 기다려야 하고, 또 가능한 예약 날짜도 늘 멀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맞는 셋째 날 아침인 오늘은 코의 상태는 좀 나아졌지만 눈물이 안 좋다. 하루 더 지켜볼까 그냥 응급 예약이라도 잡아달라고 할까 고민하는데 면조가 병원에 전화해서 나름대로 설명을 했고, 예약을 잡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요일 오전으로 시티 촬영 예약이 잡혔다. 바라는 바는 그날까지 약 잘 먹고 완전히 좋아져서, 위약금 같은 것을 내거나 확신을 위해 시티를 찍더라도 별 문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좀 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시나리오는 작은 종양이 있어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수술이 비교적 어렵지 않고 예후가 좋은 경우가 많다니까 다행이지만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면 가장 좋겠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결과가 잘 안 나오고 있다. 아직 결과를 까보기까진 시간이 좀 남았다. 원래 일이란 게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내가 애써서 하는 만큼 도와줄 동료가 이 기간에는 없다. 그래도 내가 정해둔 목표치가 있고, 그걸 만들어 낼 능력이 나에게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괴로운 때이니 일이나 열심히 하자는 마음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어제 하루종일 순수하게 기뻤다. 사실 나는 이 작가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 부끄러워서 일단 한 권을 샀다. 분량이 적은 시인지 산문인지 헛갈리는 '흰'이라는 작품. 잠들기 전에 몇 페이지만 읽어야지 하고 켰다가 다 읽어버렸다. 시처럼 글자 하나에 담긴 의미의 밀도가 높은 글이었는데도, 한 줄 읽고 눈감고 한참 생각을 해야 할 때가 많았는데도, 두 시간여 만에 다 읽어버렸다. 책의 후반부 챕터는 평론이었는데 내가 읽어보지 않은 작품에 대한 것은 건너뛰어서 그럴 수 있었다. 글에 담긴 묵직하고 조용한 마음이 너무 좋아서 다음 작품은 뭐 볼까 자연히 생각이 들었다. 출간연도 순서대로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사람들이 추천하는 '덜 괴로운' 순서대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채식주의자를 읽어야겠다. 내가 겪는 아픔과 가장 관련 있는 부분을 건드려 줄 것 같다. 나는 정면 돌파하는 스타일이니까 쉬운 것부터 읽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끌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