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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워케이션

산책중에 찍은 건물. 아파트 매 칸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던 어떤 영화 오프닝 시퀀스 같다.

약 2주간의 일정으로 런던에서 생활하며 리모트로 일하고 있다. 이걸 부르는 신조 조합어(워케이션)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고, 어제 랜선친구분께 배웠다. 판데믹 이후에 생긴 말일까? 그 이전에도 풀리모트 잡은 있었으니 꼭 그런 건 아니겠지. 내게 워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많은 유연성을 허락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덕분에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이미 서울에서도 여러 번 워케이션을 가졌었구나. 물론 그건 베케이션이라기엔 너무 자가격리 중이었는데. 그렇다면 그건 워런틴??

 

시골에 콕 처박혀 살다가 오랜만에 내 고향이 아닌 대도시를 방문했다. 내 고향은 아니지만 어제 산책하러 나갔다가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지내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대영도서관이 있길래 그곳 구경을 하고 펜톤빌 로드를 쭉 따라가면 또 나오는 리젠트파크에 가 볼 심산이었다. 가는 길은 고층빌딩도 많고, 퇴근 중인 바쁜 걸음의 사람들, 회색의 보도블록이 꼭 서울을 떠올리게 했다. 퇴근하고 역삼일대를 삼십 분 정도 산책 삼아 걸어서 강남역에서 친구 만나서 평양냉면 먹던 예전 기억도 떠오르고. 아, 여긴 평양냉면이 없네. 서울 승. 오랜만에 도심에서 수많은 통행인 중 한 명이 되어 익숙한 풍경(길치의 눈엔 도시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을 걷다 보니 기분도 좋고 생각할 거리도 점점 늘어나서 결국 세 시간이 조금 안되게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중간에 리젠트 파크에서 한 번, 도서관에서 화장실도 이용할 겸 또 한 번, 앉아서 쉬기도 했다. 나의 거리감각으론 대충 종각 또는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역사박물관 지나서 서대문에서 꺾어서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 고개를 넘어 홍제역까지 걸어가던 정도의 거리를 걸은 것 같다. 중간에 언덕도 없고 왕궁의 정원처럼 꾸며둔 공원 안에서 꽤 오래 걸었으니 피로도는 좀 덜했을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스쳐지나간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본다. 런던은 아주 오래전에 짧게만 방문했었는데도 왜인지 익숙하다. 유럽에서 산 시간이 벌써 6년이고, 내가 사용할 줄 아는 언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여서 정말 편하다. 다만 좌/우측통행이 반대여서 내가 걷는 바로 옆 차선에서 자동차가 나를 향해 달려와서 좀 인지부조화가 온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내 앞에서 좌회전하는 버스에 내 모습이 아주 가깝게 비치는데, 정면-반측면-측면 순으로 비치는 모습이 꼭 멋진 카메라워크 같다. 길거리에 개똥이 막 있는데, 바쁘게 걷는 많은 사람들이 쇽쇽 잘 피해 다닌다. 근데 누가 밟고서 막 발을 바닥에 비벼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 개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하며, 거기서 변을 봐야 하는 개의 불안함, 그걸 치울 겨를 또는 양심이 없는 개주인, 여러 가지가 상상된다. 퇴근시간대여서 그런지 사람들 표정은 온화하고 들떠 보이는 사람도 종종 있다. 공원 안에는 여우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주의푯말이 곳곳에 있었다. 여우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열심히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걸었는데 결국 지쳐서 쉴 때까지 여우를 만나진 못했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걸었더니 진짜 오래 걸을 수 있다. 마침 주제가 독서의 기술이다. 엊그제 지금 머무는 집의 호스트님, 그리고 파트너님과 독서에 대해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책을 그야말로 킬링타임용으로 보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단 강박관념이 없어도 꾸준히 읽기는 한다. 주로 300-600페이지짜리 장르소설을 자기 전에 20-50페이지씩 읽으니 짧게는 1주 길게는 3주, 평균 2주에 걸쳐 한 권을 읽는 셈이다. 철저히 재미로만 읽는 거라 딱히 머릿속에 남는 건 없다. 진행자 한 분이 나와 비슷한데 나보다 훨씬 레벨이 높고 다독하는 분이어서 재밌었다. 나도 독서대가 있으면 두꺼운 책도 시도해 보게 될까? 두꺼운 책은 정말로 무거워서 들고 못 읽겠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장르문학은 여러 권을 쪼개서 발간하니까 여태까진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있었다. 이렇게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보니 도서관에 도달했다. 리딩패스를 만들어야 서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데 이미 패스 발급하는 사무실이 문을 닫은 시점이었다. 내가 실망하니까 나이 지긋한 안소니 홉킨스를 닮은 사서분이 내일 다시 오라고 기다리겠다고 해주셨다. 왜 이렇게 친절해? 런던 사람들은 친절하다. 겉보기에만 친절한 거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겉으로 친절한 건 결국 남을 배려하는 집단의 노력이다. 도서관 건물을 감상하고 사진전시도 보고 화장실도 이용하며 쉬다가 나왔다.

 

외관도 광장도 너무 멋진 도서관. Welcome, we're open for everyone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좋다. 지금은 여행객이고 매일이 이민자인 자의 마음이라 더 그렇다.

 

어디 가서 자극적인 거 찾아 돈 쓰는 거 안 하고 산책이나 하면서 주중을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 오늘 할 일이 많고 미팅도 되게 많은 날이다. 금요일에 날 찾는 사람이 적도록 오늘 열심히 일하고 운동하고 브랜드 슈퍼마켓 구경하고 쉬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