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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오월, 파칭코, 멘탈 헬스 데이

우리 정원에서 딴 체리 두 알

오월의 우리 집과 주변은 기똥차게 아름다웠다. 걷는 곳마다 꽃향기가 났고, 매일매일 새로운 꽃들이 폈다. 아직 이 정원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씩 밝혀지는 꽃봉오리와 식물의 정체를 알아가는 기쁨이 있었다. 산책길 보리밭은 어느새 내 무릎 위까지 자란 청보리의 솟은 머리털이 바람에 쓸려 다니며 장관을 연출했다. 와인 밭도 어느새 초록색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숨 가쁘게 느끼며 나는 이직 준비를 했다. 이력서와 커버레터 그리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한 달여를 보내고, 나그네가 한국에서 돌아온 5월 후반부에는 매 주말마다 꽉 찬 일정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보냈다.

 

책은 두 권을 다 읽었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정세진의 '식탐 일기'였다. 1984는 줄거리와 명성만 숱하게 듣고 온갖 오마주만 접하다가 이제야 드디어 읽었는데 과연 너무 재미있어서 아끼고 아껴가며 꼭꼭 씹어 읽었다. 얼마 전에 벨라루스의 독재정부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책에 나온 이중사고 - 모순이 되는 두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이해관계에 맞도록 짜깁기 해서 한꺼번에 믿으면서도 그 모순점에 대해서 결코 질문하지 않는 최근에 인터넷에서 많이 보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도 비슷한 그 무언가 - 라는 개념이 너무나 크게 와닿았고, 단순화시키고 축약화시킨 '신어'라는 언어를 만들어 인간의 사고를 컨트롤하는 콘셉트도 현실을 너무나 반영하는 것만 같아 으스스했다. 무서운 책을 읽고 나니 가볍게 잡지식을 늘릴만한 에세이나 논픽션이 읽고 싶어 져서 선택한 식탐 일기도 내 목적에 맞는 책이었고 재미있었다.

 

일기를 한 달에 두 번 쓰는 것이 힘든 요즘이다.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월기에 가깝다 보니 오월 결산을 하고 있네. 원래 이렇게 결산을 하거나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 최근에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지난 4년간 했던 주요 프로젝트를 정리하다 보니 그 과정을 통해 배우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최근에 좀 결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끼고 살고 있다. 이 기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른다.

 

조금 전에 시리즈 '파칭코'를 다 봤다. 지난번 일기에도 감상을 쓴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 이후로 또다시 재미있게 본 작품이다. 다음 시즌을 위함인지 몰라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게 더 많은 채로 시즌1이 끝나버리기는 했지만, '선자'라는 주요 인물의 삶을 통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던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당시의 인간군상을 상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생각해보니 이런 이야기를 픽션으로, 오락의 형태로 본 적이 없다. 나에게는 이미 두 세대 전의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교육을 마친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의 당사자성을 가지고 배운 근현대사다. 워낙 아픈 역사이고 한국인으로서는 억울한 점이 많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발이 아닌 일화처럼 시대 배경을 접한 적은 나로서는 처음이다. 다만 작가가 1.5세 교포이고, 가정사의 배경은 나는 잘 모르지만, 어찌 보면 나보다는 덜 당사자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썼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재미있게 극 전체를 관람할 수 있었다. 마치 영화 대부를 보는 것처럼 어떤 가족의 이민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나 또한 이민자로서 하지만 완전히 내 선택으로 한국을 떠난 이민자로서 약간의 동질감과 동정심을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다 보고 날 즈음에는 그들 또한 그들의 선택으로 그곳에 갔고, 거기에 남았고, 내 선택으로 살았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는 마지막 인터뷰를 보며 겸허해졌다.

 

오늘은 멘탈 헬스 데이였다. 회사에서 전 사원에게 fully paid 공짜 휴일을 하루 더 주는 날이었다. 이렇게 좋은 회사가 어디 또 있을까 싶은 감사의 마음의 드는 날이다. 이직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조금 양가감정이 들기도 한다. 강인한 인간 드라마를 봐서 그런가 아니면 끝내주는 오월을 보내고 스스로에 대해 조금 자신감을 가져서 그런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이 도전을 할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어딜 가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그)보다는 약간이라도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이렇게 딛고 뛸 기반을 만들어 준 지금 회사와 팀에 감사한다. 그리고 팀 할머니 휴가 왕창 써놨던데 그거 다 오기 전에 제발 이직처 찾고 싶다. ㅋㅋㅋㅋㅋ 이제 그만 놀고 지원하고 싶은 곳 찾아서 지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