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때는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다. 내가 눈이 나빠진 원인이 자야 할 때 안 자고 스탠드를 켜놓고 어두운 상태로 책을 봐서라는 엄마의 주장이 떠오른다. 내 침대 옆에 긴 책장이 있었는데 거기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다 읽고, 좋아하는 건 종이가 닳을 만큼 읽고 또 읽었다. 걸어서 30분을 넘게 가야 하고 산꼭대기에 있었지만 도서관에 가는 것도 참 좋아했고, 대여점이 동네마다 생긴 뒤로는 만화책과 장르소설도 많이 빌려봤다. 그런데 입시를 하게 되면서부터 책을 안 읽게 되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커다란 도서관이 수업하는 곳 가까이 있다 보니 종종 전공과 관련된 책을 빌리는 김에 소설도 한두 권씩 빌려봤던 것 같다. 사서 보기엔 부담스러운 판타지 전집 등을 이때 많이 봤고 하루키에 푹 빠져 살았다. 회사에 다니게 되고부터는 다시 책을 거의 읽지 않게 되었다.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다른 미디어로 이야기를 접하기가 쉽다 보니 자연스럽게 안 읽게 된 것 같다. 한동안 책을 아예 읽지 않고 지내는 기간을 가지다가 언제부턴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하나 읽고, 너무 재미있어서 그 작가의 것을 (엄청나게 많더라) 하나씩 독파하게 되었다. 그것이 일종의 워밍업이 되었던지 이후로 내가 기억하는 최소 6-7년간은 책을 한 번에 한 권씩 꾸준하게 사서 읽고 있다. 읽는 속도도 워낙 느리고 매일 읽지도 않기 때문에 잊어버린 내용을 복습하러 다시 돌아가기도 해서 엄청나게 더디다. 한 권을 사면 어지간해서는 그걸 다 읽고서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른다. 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편은 아니어서 다음 볼 것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간혹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을 고르기 어려울 경우 한동안 아무것도 읽지 않기도 한다. 작년에 읽은 책들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적어둔 기록을 보니 요즘에는 한 달에 한 권 정도 읽고 있다. 기록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완전히 다 읽은 책에 대해서만 하고 있지만 예외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전공분야에 대해 팔로 업하기 위해 읽은 책은 거의 포함시키지 않는다. 오디오북은 종이에 비해 제약이 많아서 선호하지 않지만 일 년에 한 권 정도는 오디오북으로 듣기도 한다. 올 해는 작년보다 좀 더 많이 읽고 싶다. 책을 읽으면 작가와 깊은 대화를 하는 기분이어서 좋다. 가끔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입력되는 수많은 파편의 정보로부터 뇌를 피신시켜서 고요한 곳에서 신뢰하는 사람과 퀄리티 타임을 가지는 것 같은 휴식의 느낌마저 든다.
2021년에 읽은 책
1월
- 시선으로부터, - 정세랑
현실적인 환상소설. 심시선씨는 히어로 같았다. 표현력이 탁월해서 읽는 내내 개운했다.
2월
- 다정한 구원 - 임경선
리스본 여행기에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사색과 감정을 버무려 쓴 에세이. 선배로부터 조언을 조금 얻어감. - 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너무 재미있었다. SF 단편집. 환경에 대한 애정과 염려가 가득 담긴 심지 굳은 세계관이 멋있다. 인물들간의 관계가 담백하면서 마음을 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3월
- 내일의 부 1, 2 - 조던 김장섭
부동산은 서울에 재개발 가치 있는 곳 아님 투자가 의미 없음. 미국주식 시가 총액 1위 사고 나스닥이 -3% 한달에네 번 찍으면 공황이니까 다 빼도 미국채권으로 돌리라 함. 중미전쟁 지금 한창이니 중국화 뚝뚝 떨어지면 지켜보라함. 근데... 정말?
4월
- 고양이를 버리다 - 무라카미 하루키
돌아가시고 없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뒤늦게 써내려간 심경에 공감한다. 역사를 되짚어 가다 깨닫는 현실의 아슬아슬함에도 공감했다. 나는 엄마에 대해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 물 위에 씌어진 - 최승자 시인
시집을 통채로 다 읽어본 경험은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최초적 감각이었다. 그리고 시인이랑너무 긴밀하게 교감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정신병동에서 쓴 시들이라던데.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인의 대상을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에 대한 단호한 입장과 동시에 존재하는 아슬아슬한 기분이 느껴졌다.
5월
- Escape from the rat race - downshifting to a richer life - Nicholas Corder
그냥 나를 묘사해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6월
- 미드 센추리 모던 - 프랜시스 엠블러
- 일인칭 단수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헛갈리는 단편 소설집. 환상적인 부분을 걷어내면 그동안 작가의 다른 에세이에서 써 온 이야기도 섞여있고 잘 지어낸 거짓말 모음집 같다. 그런데 에세이도 사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 된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아닐까.
7월
- 우울할 땐 뇌과학 - 앨릭스 코브
도움 되는 정보가 너무나 많다. 집중 안될 땐 뇌과학이란 책은 어디 없을까.
10월
- 춥고 더운 우리집 - 공선옥
소탈하고 정직한 수필들. 가난하게 살아온 한국인의 가슴속에 깝깝하게 응어리진 심정을 글로 풀면 이렇구나. -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어슐러 K. 르귄 (중간에 서너 작품에 대한 비평은 건너뜀)
솔직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대가의 비평, 너무 멋짐. 또한 마지막에 글쓰기 숙박을 하며 적은 읽기가 너무 재밌었다.
11월
- 타임머신 - H. G. 웰스
1800년대의 소설이라니 너무나 화들짝 놀랐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를 풍자하는 것은 여전히 공감이 되었고, 너무너무 멋진 상상력이다.
12월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이 어마어마하게 솔직한,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너무도 거침없이 한 여자의 수필들. 너무 개운하고 낯뜨겁고 그러면서도 되게 타당한 까발림을 스스로를 향해, 스스로를 위해 쓸 수 있다니. 대작가는 역시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