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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글을 써야만 생각을 할 수 있다.

당당한 고양이 요를레이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글쓰기를 게을리했다. 내가 글을 쓰는 직업도 아니고(직업적 글쓰기는 유저스토리 쓰기 뿐...) 이 정도 쓰면 많이 쓰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부채감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이다.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은 아니어도 일기를 쓰며 살아왔다. 하루에 있었던 일이 발생 순서대로 나열되는 방식의 글은 아니고,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생각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주로 찜찜하거나 억울하거나 괴로운 감정에 대한 관찰과 탐구이길 바랐다. 좋지 않은 기분이 들면 그 기분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데, 찬찬히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면 기분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다. 그리고 한 생각과 연이어 이어지는 다른 생각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은, 방금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써두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과 동시에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도움이자 위안이었고, 버릇이 되니 아무래도 글을 쓰고 있는 환경을 준비해야 생각에도 진척이 있는 사람으로 큰 것 같다. 이 것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에, 지난 일기에서도 썼지만,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좀 해보려고 시도하고 여러 번 실패하는 것을 관찰한 다음이다.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대한 감상은 떠오르지만, 깊은 생각은 좀처럼 할 수 없었다. 최칸트 되기는 실패다. 아니 그런데 칸트가 꼭 걸으면서 철학을 했으리란 보장도 없다.

 

고 이순자 시인, 이순자 작가님의 2021 매일 시니어 문학상 수상작인 '실버 취준생 분투기'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아름다운 글이었다. 천박한 사회에서 약자로서 겪은 경험을 솔직하지만 우아하고 자애롭게 풀어 쓰신 점이 경이로웠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 연민보단 불만이, 인정보단 체념이 주된 정서인 나는 이런 소위 말하는 따뜻한 시선에 대한 간접경험이 좋다.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만난 할머니들을 떠올리며 시를 짓는 마음이 너무나 고귀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반성해야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글에서 묘사된 요양보호사와 사용인의 관계는 나와 우리 가족도 경험이 있다. 요즈음엔 없는 집이 더 드물 거다. 엄마의 병간호는 전적으로 아빠가 자처하셨으므로, 우리 가족을 도와주신 분들은 사실은 본인의 업무가 아닌 집안 살림을 자처해서 거들어주셨다. 대부분 본인 사정으로 그만두기 전까지 오래 함께 해주셨다. 한 분 한 분 성함도 여쭤봤었는데 다 까먹었다. 대신 얼굴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부조리한 사회,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대표적인 대인 작가는 내 마음속에서 항상 박완서 작가님이다. - 나는 다독가가 아녀서 아는 작가가 많지는 않다. - 그래서 얼마전 발간된 그분의 수필집을 결제하고 전자책으로 다운로드하였다.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있었는데 이순자 님의 글을 읽고 생각이 난 김에 샀다. 한 꼭지 중에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보다 어쩌면 더 흔한 것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을 의심했는데 그 의심에 대한 배신'이 짚어진 부분이 가슴을 쿡 찔렀다. 이 것이 최근의 나의 태도였던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나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나를 인종차별 할까봐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의심을 했고, 내 능력과 성취에 대해서 의심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괴롭혀왔다. 하지만 꽤 많은 경우에 사회는 이런 나의 의심을 배신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늘 생각보다 친절했고,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면 다들 받아주었고, 묵묵히 내 일중 하나여서 다른 동료를 서포트해줬을 뿐인데 팀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감사인사와 박수도 받았다. 그런데도 가끔 내 의심을 배신하지 않았던 한 두 가지 사건만을 곱씹으면서 confirmation bias(확증 편향)를 굳혔는지도 모른다. 그 피해자는 그 누구도 아닌 나일뿐인데 말이다.

 

오늘은 매일 별 다름없는 날씨여서 날씨 탓을 하기도 어렵지만, 유난히 더 기운이 없다. 도무지 어떤 일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기분의 정체를 좀 살펴보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그 정체가 조금 들어난 것 같다. 고 이순자 님이 투쟁을 통해 얻어냈고,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던 '고요한 내 시간'을 나는 실컷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후를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