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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Journal

혼자 살아간다는 것

오늘 산책하다가 본 무지개

10월 중반쯤부터 19박 20일간 시아버지가 다녀가셨다. 10월 동안 이곳에는 글을 하나밖에 못 썼다. 전반적으로 책도 별로 읽지 못했고, 글도 전혀 쓰지 못했다. 정신이 붕 떠 있는 상태로 10월은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시아버지가 계시는 동안 면조가 나름대로 많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따라서 재택근무하는 틈틈이 근교 관광을, 마지막 주는 휴가를 쓰고 알프스 지역 여행을 다녀오고 이후에 쉬엄쉬엄 프랑크프루트 나들이도 다녀왔다. 처음에는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 외출도 잘 못하시고 너무 답답하신 참에 여기에 오셔서 우리 사는 것 구경도 하시고 정원일을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한 독일행인데, 결과적으로 셋 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관광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빠듯한 시간표로 최대한 많은 랜드마크를 찍는 방식의 여행에 익숙하시지만 우리로선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 명의 성인이 처음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같이 보내는 상황이었고, 세대, 출신, 습관, 문화, 사고방식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최대한 잘 해드리고, 해주시는 것을 잘 해석해서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힘이 부쳐서 어느 순간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정원을 함께 정리하고, 새끼줄 만드는 법을 배우고 할 때는 즐거웠다. 알프스에서 산행을 할 때도 즐거웠다고 한다. 나는 몸이 좋지 않고 정신이 피폐해서 산행에 함께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한국 방송이 나오지 않는 집에서의 밤은 길고 무료했다. 열심히 준비해 드린 음식은 입에 맞지 않으셨고, 비슷비슷한 풍경을 보며 시종일관 지루해하셨다.

 

독일에 오기 전에도 시가와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살고 있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있었기 때문도 있고, 솔직히 말해서 단지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 집의 일원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지만 다행히 면조의 부모님은 그럭저럭 깊은 이해심으로 수긍해주셔왔다. 그리고 거리를 둘 수록 성인이 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지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독립한 지 20여 년이 된 면조는 특히나 2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의 변한 모습을 많이 발견했을 것 같다. 이전에는 둘의 관계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면조는 지난 20일간 많이 피곤해했고, 시종일관 짜증이 나 있었다. 특히 정치 이야기가 시작되면 둘은 전혀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 사고방식이 다른만큼 소통 방식도 달랐다. 주어와 목적어를 종종 생략하기 때문에 눈치껏 알아서 이해해야 하는 한국적인 할아버지의 화법은 나에게도 어려웠는데, 가뜩이나 독일적인 소통 방식에 몰입해서 살고 있는 면조는 몇 번이나 되물어야 했다. 가끔 대화중에 서로를 답답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다른 점이 거슬렸다. 여자의 일과 남자의 일을 구분짓는 사고방식, 그 결과로 스스로 물 한잔 떠마시지 않는 모습이 끔찍했다. 물론 손님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다 같이 여행을 가서도 마찬가지셨다. 그러면서도 물은 꼭 끓여서 드셔야만 했다. 일주일쯤 후에 내가 투덜대니 면조가 말하기를, 집에서는 물도 직접 끓여서 드시고 어머님이 냉장고에 준비해둔 반찬을 꺼내서 밥도 스스로 차려서 드시고 설거지도 하신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한 번 가르쳐드리는 의식을 거쳐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주방 투어와 함께 사용법 설명을 자세히 드렸다. 이후에는 스스로 율무차를 타 드시거나 하시고, 적어도 목이 말라도 기다리지고 앉아있진 않으셨다. 나의 선입견과 아버님의 습관과 소극적임의 콜라보가 만든 오해라고 생각한다.

 

아버님을 포함한 한국의 대다수 50년대생 한국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자는/남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공식과 나(그리고 면조)는 아주 먼 삶을 살고 있다. 현재로썬 실질적인 '가장'역할은 내가 하고, 집안일은 대충 절반씩 한다. 우린 역할을 분담하지 않는다. 그냥 두 명의 성인이 각자의 몫을 하고 산다. 한 명이 빨래를 돌리면 다른 한 명이 건조를, 그러면 다른 한 명이 접어서 정리하기를 한다. 배가 고프면 상대방도 식사가 하고 싶은지 묻고, 같이 먹을 것을 준비하거나 아닐 경우 일 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치운다. 누군가 이인분의 식사를 준비했다면, 정리 및 설거지는 다른 사람이 한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매일의 청소는 내가 하지만, 가끔씩 청소해도 되는 곳은 면조가 주도해서 청소한다. 집안의 거의 대부분의 일을 우린 둘 다 할 수 있고, 둘 다 다른 한 명이 없이도 이 집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이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건강/안위/일상을 이어나가는 책임을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한 사람에게 의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끼니를 챙기는 것, 물과 약을 제 때 챙겨 먹고 건강관리를 하는 것, 위생적으로 생활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 등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먹을 것을 스스로 챙겨 드시지 못하는 아버님이 어린아이 같아 보였고, 동등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유교사상과 가부장제도에 푹 빠져 사시는 아버님 또한 나를 동등한 입장의 인간이라고 보고 있지 않음은 확실했다. 하지만 인격이 나쁜 분은 아니셔서 티내지 않으려고 하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티가 좀 나긴 했지만 내가 눈썰미가 너무 좋아서 봐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한 맛 가부장에 속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유해하기만 한 사상을 설파하셨고, 전혀 동의하거나 비위를 맞춰 드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버님도 나 때문에 적잖이 당황하고 힘드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덕분에 당신 아들이 편하게 공부하고 있는 거라는 것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어디서든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몸가짐, 마음가짐은 한 편으로는 매우 부러웠다. 나도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대접받고 존중받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대부분 대접하고 존중해 드리는 입장으로 살아왔다. 내가 영국여왕쯤 되었으면 여자로 태어나도(언제라도 남자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 존경과 존중과 대접을 디폴트로 받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서 대접의 의미는 누군가 내 식사나 의복을 시중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 지능, 재능, 노력, 성취가 여자라는 이유로 디스카운트되지 않고 오롯이 대접받고 싶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시중 들어주는 대접조차 받고 살아왔다. 어떤 삶을 살아왔건 간에 이런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혼자 살아간다는 것(제목이자 메인으로 하고 싶던 말)으로 돌아와서, 나는 앞으로도 더더욱 이 고집센 자존심(이자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서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목표로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급적이면 현금흐름도 스스로 창출하고 모든 것을 이 세상 떠나기 전까지 스스로 할 수 있고 싶다. 좋은 반면교사를 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면조는 '우리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라고 부탁 같은 투정을 했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면조는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이 일기에 쓴 것 외의 3가지 정도의 사소한 불만사항을 또 제거하면 아버님은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특징이 없다면 이 분은 이 분이 아니겠지. 아무튼 사람은 싫어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세상이 싫고, 그걸 고쳐보려다 결국 포기하고 살아온 가족들의 삶에 연민이 조금 가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므로 그만두고 mind my own business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