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국에서는 별 욕심 없이 체념하면서 살다가 독일에 와서 학력도 업그레이드 했고, 출세욕구와 돈을 좀 많이 벌고싶다는 욕구가 약간 커졌다. 다만 그 것들은 내가 애초에 많이 가지고 태어난 욕구가 아니어서 그런지 '내가 이렇게 고생고생 하면서 배우고, 버티고 있는데... 적어도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해외여행 갈 때 어지간해선 비즈니스 타는 사람 되고 싶다' 라는 보상심리가 깃든 탓이다. 하지만 물론 이건 정확히 목표로 쳐 줄 수 있는 수준의 바람도 아니고, 따라서 플랜도 특별히 서 있지 않다. 매일매일 조금씩 뭔가 노력하다보면 기회나 길이 보이겠지 싶은 막연한 마음일 뿐이다. 사실 나는 식욕이랑 새로운 경험을 자꾸자꾸 하고싶은 욕구를 제외하고는 큰 욕심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잔에 차갑게 식은 에스프레소가 남아있으면 그거 다 마실 때까지 새로운 커피를 구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회사 동료가 '너는 참 genügsam한 사람이구나!'라고 새로운 독일어 단어를 알려줬다. 독일어 형용사 genug이 충분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영어로는 저런 단어가 있던가 생각해보니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검색해봤다. Frugal이란 들어는 봤소만 써본적은 없는 단어가 나왔다. 생각해보면 영어로 말하는 내 자아는 좀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요즘 자신감과 앰비션이 커져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건가 싶기도 하다.) 저런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릴 인간은 아닌 것 같다. 비슷한 의미를 전하고 싶을 때 오히려 humble이란 단어를 쓰는데 이건 좀 절제의 미덕을 깎아내리는 뉘앙스도 가지고 있어서 유머러스한 상황에서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 대해 한국어(또는 한자어)로 기가막힌 표현을 친구가 알려줬다. 안빈낙도,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안분지족. 안빈낙도보다는 안분지족이 나를 형용하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내 분수를 제법 잘 파악하고 있고 그에 맞는 소비를 하는게 절대로 옳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건 상당한 수련과 공부가 필요한 기술이라고도 믿고 있다. 일단 내 분수를 파악하려면 내 수중의 자산이나 고정 수입 등을 통해서 객관적인 내 경제적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고, 그걸 시장상황에 비교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물건 가격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잖아.
하지만 무작정 아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써야 하는 곳엔 써야 한다는 확실한 방향이 있다. 예를들어 나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에는 돈을 아끼고 싶지 않다. 그래서 기계를 살 때는 내구성이 좋고, 성능 또한 최대한 좋은 것으로 사서 오래오래 수리받을 필요 없이 잘 쓸 수 있는 것이 목표가 된다. 애플케어 같은 것도 비싸지만 그냥 사버린다. 프리미엄 서비스란건 어쨌든 만일의 사태에 굉장한 시간절약을 시켜주니까. 어떤 기계 하나가 내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장과 수리 과정에서 필요한 백업, 복구, 약속잡기, 운송, 쓰던 기계를 못쓰게 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효율이 갉아먹는 시간 등 어마어마한 임팩트가 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병도 얻을 수 있어..!
근데 그래서 결과적으로 돈을 아끼게 되는 경우가 아이러니하게도 많이 생긴다. 대충 상황에 맞는 것을 사기 싫으므로 언제까지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지금 식기세척기기가 너무 가지고 싶고 그게 있으면 집안일에 쓰는 시간을 확실히 줄일 수 있을텐데, 주방이 너무 작아서 가장 작은 사이즈만 살 수 있다. 하지만 신뢰가 가는 제조사는 가장 작은 사이즈를 만들지 않는다. 작은 사이즈는 아무래도 학생이나 예산이 적은(작은 집에 살아야 하는) 사람을 타겟팅해서 만들었다보니 마감도 다 마음에 들지 않고 한마디로 싸다. 반드시 몇 년 써서 부품이 마모되거나 내 부주의로 고장이 날 것 같다. 무엇보다 큰 냄비나 후라이팬을 넣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큰 주방을 가지게 되는 날까지 참을 수 밖에 없다. ㅠㅠ 밥솥도 같은 이유로 못 사고 있다. 사고 싶은 것은 적어도 좋은 스테인레스와 겹겹이 고무패킹을 넣어 디자인된 짱짱한 모델인데 그런건 보통 6-8인분 이상이고 그정도 사이즈의 밥솥을 놓고 쓸 공간이 내겐 없다. 같은 이유로 옷도 별로 없고, 아이쇼핑 하면서 마음에 드는 옷을 봐도 현재 같은 기능을 하는 옷이 옷장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걸 버릴 자신이 없으면 새 것을 사지 않는다.
반면 전자레인지는 내 시간을 확실히 아껴줄 물건이니까 선반을 하나 설치해서 놓을 곳을 마련했고, 제조사만 보고 그냥 샀다. 플라스틱 전자렌지에게 큰 것 안바라고, 제조사가 가진 경험을 생각하면 이정도 단순한 가전을 쉽게 고장나게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언젠가 미니멀리즘에 대한 글을 읽다가 물건을 산다는 것은 사실 그 물건값보다 그 물건을 둘 공간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문장을 읽었었다. 나의 안분지족을 하드케리 하고 있는 것은 내가 가진 한정된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덕분에 물건을 살 예산은 늘 넉넉한 편이다.
하지만 늘 위시리스트는 있다. 여기에다라도 써봐야겠다.
- 높고 아름다운 캣타워
- 샤오미나 니토 로봇청소기
- 커피그라인더 교체
- 10년 정도 입은 낡은 베이지색 코트를 대체 할만한 포근하고 넉넉한 사이즈의 코트
- 블래스트 레인코트 또는 바버 왁스 자켓
- 플레어 에스프레소 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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