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다시 오래된 칼리타 드리퍼로 돌아왔지만 케멕스, 하리오, 모카포트 등을 사용해서 여러 방법으로 커피를 추출하며 마셨던 적이 있다. 조금 규모가 있는 도시를 여행 할 때마다 핸드드립을 하는 힙한 카페를 찾아다니며 바리스타들의 방식을 유심히 관찰한 뒤에 집에와서 따라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배워가며 결정된 내 방식만을 고수해서 내리고 있다. 어쩐일인지 내 입맛에는 세라믹도 아닌 플라스틱 칼리퍼 드리퍼 가장 작은 사이즈로 내린 커피가 제일 맛있다. 원두도 이제 여기저기 모험하는 것은 게을리 하고 늘 같은 것만 사게 되었다. 토요일마다 장터에 나와 원두를 파는 이 지역 로스터리에서 코스타리카 원두를 500그람씩 산다. 아무튼 커피를 핸드드립해서 먹은 세월이 쌓여서 그런지(약 2010년부터 시작 한 것 같다) 이제는 내가 집에서 내리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 실력있는 바리스타들이 모이는 힙한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 가도 다 마시고 나면 '맛있었지만 내 커피가 한 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도 스스로 떠다 먹을 줄 모르는 아저씨들의 집밥 타령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 내가 스스로 내리고 연구하면서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맛만 추출하고 싫어하는 맛은 최대한 안나오는 방법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막연히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 잠자리에서 읽고 있는 '커피과학'이란 책에서 과학적으로 커피 맛을 분석한 부분을 읽다보니 확신이 들었다. 사람마다 맛을 느끼는 유전자의 발현 정도도 다르고, 따라서 입맛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난 내 타고난 입맛, 커피를 마시면서 사회적으로 개발해온 입맛까지 다 통틀어 내 입맛에게 가장 친절한 커피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사실 나 밖에 할 수 없는게 당연한 거잖아.
기구는 정말 소박한 것들만 사용한다. 비싼 장비를 쓸 형편이 안되기도 하고, 손에 익은 것들로 가장 능숙하게 내릴 수 있어서기도 하다.
핸드그라인더를 썼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늘 소원이던 전동 바 그라인더를 샀다. 사실 정말 사고 싶은 수준의 좋은 모델은 60만원이 훌쩍 넘어서, 그냥 독일 중소기업의 철강 기술력을 믿고 Rommelsbacher사의 가정용 자그마한 원두 바 그라인더 제품을 찾아서 샀다. 4-5만원정도 준 것 같다. 이 가격차이를 볼 때 당연히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분쇄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만족하며 벌써 2년여를 잘 쓰고 있다.
독일에 유학와서는 워낙 갖추지 않고 사는 것에 익숙해 지다보니 전에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커피 드립 서버도 따로 사지 않았다. 대신 IKEA에서 산 유리 티포트가 사이즈가 딱 맞아서 그위에 드리퍼를 수평을 잘 맞춰 얹어놓고 필터를 깐다. 아니면 그냥 컵 위에 바로 드리퍼를 올려 내려도 된다. 가볍고 작은 플라스틱 드리퍼의 어마어마한 장점이다.
물을 끓여 한 김 뺀 뒤에 드립용 주전자에 따르고, 종이필터를 적시고, 종이필터를 적시고 흐른 물을 따라낸다. 젖은 필터 위에 분쇄된 원두를 탈탈 털어 넣고 흔들어서 수평을 대략적으로 맞춘다. 원두 위에 조심스럽게 물을 나선형 코스를 따라 부어 마른 원두를 적신다. 다 부풀어 오를 때까지 잠시 지켜본다. 중력에 따라 흐른 물이 원두를 충분히 적시고 불려서 부풀어 오르면 곧 가스가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정도 가스가 빠져 나가고 원두 안에 물이 잘 흐를 수 있는 길이 나면 부푼 원두가 꺼지기 직전에 물을 다시 흘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는 물을 좀 넉넉하게 천천히 붓는 편인데 아무래도 처음 이렇게 내린 커피가 제일 산뜻하고 맛있기 때문이다. 처음 나선형을 그리며 흘린 물이 전부 다 빠져나가기 전에 두 번째 물을 흘려넣는데, 이 때는 첫 번째 물과 원두가 만나 만든 맛있는 맛을 다 씻어낸다는 느낌으로만 물을 붓는다. 처음 보다는 속도가 좀 더 빠르고, 물의 양은 좀 더 적다. 나는 여기까지만 한다. 세번째, 네번째 붓는 방식도 봤지만 그러면 쓴 맛이 좀 더 진해져서 싫다. 이 방법으로 하면 물을 끓이는 시점부터 다 내리는데까지 6-7분 정도 걸린다. 바쁜 아침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다.
마실 때는 이렇게 내린 원액과 뜨거운 물을 섞어서 마신다. 원액이 1이라면 뜨거운 물은 0.7정도 섞는 것이 가장 내 취향에 맞는데, 많이 마시고 싶거나 할 때는 1.5까지도 넣는다. 피어오르는 향이 워낙 좋아서 사실 좀 묽어도 되게 구수하고 맛있다. 컵에 커피를 따를 때는 가급적 컵의 온도를 따뜻하게 미리 만들어둔다. 그러면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도 산미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차가운 컵에 따라서 급하게 식어버린 커피는 식어가면서 점점 산미가(시큼한 신 맛은 아님) 강해지는 느낌을 느낀 적이 있어서 많이 바쁘지 않는 한 지키는 편이다. 온갖 향과 씁쓸한 맛이 입에 들어왔다가 너티하고 고소한 맛을 남기며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정말 좋다. 처음에 씁쓸한 맛을 느끼면 뒤에 남는 견과류의 기름같은 맛이 특히 더 고소하고 달콤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난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보다는 씁쓸한 맛이 강한 커피를 더 좋아한다. 근데 그 씁쓸함이란게 너무 진하면 마냥 쓰게만 느껴져서 싫다. 탄 맛이 나는 것도 별로다. 아무튼 나만의 까다로움이 있다.
맛있는 커피를 내려 마셔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추운 아침에 따뜻한 침대안에서 기어나올 수 있는 동력이 되기에 나는 커피 내려 마시는 것을 그만두지 못 할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쓴 저자도 미생물 의학자인데 아직 뒤에 나올 커피와 건강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은 안 읽었지만 이렇게 하루를 살만하게 만드는 커피가 몸에 좋지 않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