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만날 약속 제안을 '논문 모드'라는 핑계로 미루고 있다. 거짓말도 안 해도 되고 굉장히 편리하다. 이런 식의 핑계거리가 일년에 서너차례만 있었으면 싶을 정도다. 물론 친구들을 만나서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고, 좋은 영향도 많이 받고 돌아오지만 솔직히 말해서 만나러 갔다 오는 과정도 너무 멀고 귀찮고, 대인관계를 할 때의 나는 집 안에서의 원시적인 나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회사 출근하는 2-3일 말고는 거의 모든 나날을 논문을 쓰느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에 외출 할 일이 별로 없다. 원래 카페나 외부에서 집중을 더 잘하는 나인데, 내가 사는 독일 시골에는 와이파이가 잘 되고 작업 할 의자나 테이블이 갖추어진 카페가 없다.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장소는 학교 도서관 또는 집 뿐이다. 학교 도서관도 쾌적하고 좋은 장소지만 자리 맡는 데에도 신경전이 필요하고, 화장실을 가는 등 잠깐 자리를 비울 때 랩탑이나 소지품 걱정도 되고 이래저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고 판단해서 집에서만 쓰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제는 2-3일 집 밖에 아예 나가지를 않았어서 답답해서 구지 드럭스토어에 다녀왔다. 어차피 사야 할 세제나 설거지용 스펀지를 사러 다녀 온 것인데 주요한 의도는 바람쐬러였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축축하고 추워서 슬펐다. 이렇게 눈, 비, 진눈깨비, 싸리눈, 비, 안개비, 비, .. 아무튼 축축 눅눅한 날씨가 며칠째 이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파란하늘과 햇살은 지지난주 쯤에 한 5분간 본 게 다인 것 같다. 생각난 김에 비타민D 알약을 먹어야겠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약이 노란색이라 마치 그 안에 햇살을 농축해 둔 기분이 든다. 플라시보 효과란 중요하니까, 좋은 디자인이다.
마감일까지 이 상태를 미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도록 주 5일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 자체의 효과도 좋지만 논문 외에 할 일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은근히 위안이 된다. 매일 아침에 쓰고 있는 이 일기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쉬운 일을 먼저 끝내놓으면, 하기 싫은 일을 참고 시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기계발서 같은 것 쓰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닝 리추얼의 효능이란게 이런건가보다.
사실은 어제 너무 축축 쳐지고 집중도 안되고 머리도 안돌아가고 해서 넷플릭스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도 두 편 보고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사이트 보며 머릿속으로 여행계획도 세우고 하면서 좀 놀았다. 오늘도 딱히 의욕이나 기운은 없다. 그런데 날씨 탓을 하기에는 이런 날씨가 너무 계속되고 있다. 비행기 타고 이태리나 그리스로 날아가서 리조트에서 쓸 수는 없으니까. 그냥 환경은 무시하고 써야한다. 하. 왜 암울한 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겁나 많이 나왔는지 알 것 같다.